기질 자체가 순하고 느긋한 우리 아이는 엄마들이 말하는 "육아 매운맛"으로 따지자면 1단계다. 아니, 우리 아이를 날 적부터 보고 있는 친구들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 집 아이는 "매운 라인"에 들지도 못하고 "크림 라인"이란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운동신경이 전혀 없어 별명조차 "어설이"인 내가 "걸어 다니며" 육아하는 게 가능이나 했을까. 친구들은 날개 달린 어깨끈으로 꼬맹이들을 1M 거리에 힘겹게 잡아두는 "달려라 아기" 시기에도 우리 아이는 본인 스스로 엄마 1M 전방을 고수했다. 그런 딸 덕분에 나는 평생을 이어온 취미생활인 독서를 육아와 한결같이 병행할 수 있었고, 덕분에 우리 아이는 수면등보다 독서등에 잠드는 게 익숙한 아이가 되었다. 더욱이 책 넘기는 소리가 마음이 편하다니. 천상 내 딸 맞다. 그 외에도 그렇다. 내가 요리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다지 편식이 없는 입맛을 가진 덕에 아이가 밥을 잘 먹고, 웬만해서는 떼쓰거나 울지 않고 조곤조곤 말하는 타입이라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주변 꼬마 녀석들이 말하는 "우아한 이모"는 9할이 아이 덕이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사실 내가 아이를 키운다는 표현보다, 나는 아이와 같이 자라고 있다는 편이 적합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아이를 따라 자라는 것 같다. 그 상태로 쭉 살아오다 보니 당연한 듯 자연스러운 우리 집이지만 때때로 그게 마음이 아픈 날이 있다. 가령 오늘처럼 아이가 "책 읽기 시간에 미안한데 나 응아가 하고 싶어"같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을 미안해하는 날이랄까. 안 그래도 착한 아이가 미안해하기까지 하면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낮에 그런 대화를 하고 난 밤이면 어김없이 내 마음은 롤러코스터를 탄다. 내가 너무 무능한 엄마일까, 내가 아이가 자라는 만큼 같이 자라주지 못하나, 내가 아이를 더 배려하고 양보하도록 은연중에 강요하고 있나 등의 자책이랄까.
오늘도 늦은 밤 커피 한 잔과 책을 앞에 두고 자책 타임에 빠져있다가 몇몇 이웃들, 언니와 수다를 주고받았다. 소중한 이웃님이 말한다. "엄마가 애보다 살짝 모자라야 튼튼하게 자라더라고". 그 말에 눈물이 왈칵 나려 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내게 가장 필요했을 말. 언니 역시 "아이가 '미안해', '고마워'를 자주 말한다는 것은 네가 늘 아이에게 '미안해', '고마워'를 잘 말해주었기 때문이지. 미안한 걸 모르고, 고마운 걸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각박해지는 건데 그걸 잘한다고 걱정하고 있다니. 너 모자란 거 맞네"라며 웃어준다.
그제야 문득, 아이는 원래부터 나보다 한 발 앞서 자란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나보다 한 발 앞서 자라고 있는 아이를 왜 새삼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을까. 그저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봐주면 그만인 것을. 그저 든든히 뒤에 서있어 주면 충분한 것을.
내가 한숨을 쉬던 문장들을 살짝 바꾸어본다. '책 읽는 것 말고는 해 준 게 없는 것 같다'는 말을 '책은 참 부지런히 읽어줬구나'로. '영양소에 맞춰 잘 챙겨 먹이지 못했다'는 말을 '무엇이든 잘 먹는 아이로 키웠다'로. '멋쟁이 꼬마로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말을 '내 취향에 아이를 욱여넣지 않았다'는 말로. '아이보다 모자라다'는 말을 '아이의 뒤에서 응원하는 엄마다'로. 이 문장들은 그저 내가 나를 위로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바꾸어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또 내일 아이와 함께 세상을 걸을 용기가 날 것 같아서, 아이 손을 잡고 웃을 명분이 설 것 같아서.
아이는 언제나 나보다 한 발 앞서 자란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뒷모습을 따라 부지런히 걸으며, 아이를 더 많이 응원하기로 마음을 먹어본다. 며칠 지나지 않아 또 자책하는 시간은 오겠지만, 살며 수없이 그러겠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긍정의 언어로 나를 달래줘보려 한다. 다행히 오늘도 아이를 따라 한 걸음 자란 것 같아서, 오늘의 나에게 토닥토닥, 응원을 건네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