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평생의 단짝이 생긴 것 같습니다.
참 평화로운 시간이다, 그렇지?
평화로운 게 어떤 거야?
딱 이런 거. 사랑하는 엄마랑 좋아하는 책을 보면서 천천히 마시는 우유 같은 거.
유치원에서 데려와 샤워를 시키고 머리를 말리는 데 나에게 무얼 하고 있었는지 묻는다. 머리를 말려주는 중이라고 대답을 하니, 자신이 집에 오기 전이 궁금한 거라고 고쳐 말한다. 책을 읽고 있었다는 내 말에 "병자호란? 아니면 비로소 내 마음의 적정온도?"하고 되묻는다. 매번 내가 읽고 있는 책 제목을 다 아는 네가 신기하고 기특하다고 말하니 되려 "엄마는 내가 읽는 책 내용까지 다 알면서 뭘 그래"하고 웃는다. 자기도 엄마랑 책을 읽고 싶다기에 같이 읽을까 물어보았더니 "바늘 6까지 따로, 또 같이" 읽고 싶다고 말을 한다. 이 말은 글씨를 꽤 읽게 된 후부터 사용한 것으로, 따로 읽고 엄마가 읽어주었으면 하는 책을 골라두겠다는 거다. 우리는 정말 바늘이 12에서 6이 되도록 조용히 각자의 책을 읽었다.
바늘이 거의 7이 되도록 아무런 말이 없이 책만 보고 있기에 식탁을 톡톡 두드리니 고개를 들며 방긋 웃더니 이제 집중이 끝났느냐고 묻는다. 본인은 조금 전에 고개를 들었을 때 6이 살짝 되지 않았고, 엄마가 너무 집중한 것 같아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노라며 "참 평화로운 시간이다, 그렇지?" 한다.
맙소사. 우리 집 꼬마는 도대체 몇 살일까. 서로 마주 앉아 책을 읽는 시간이 평화롭다는 말도, 엄마의 집중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말도 놀라울 만큼 어른스럽다. "따로 시간"이 끝나고 "같이 시간"이 되어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소한 것에도 깔깔 웃음을 터트린다. 그런 아이를 보고 있자니 행복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나와 같은 취미를 가진 나의 단짝 친구. 내 성향이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나의 단짝 친구.
나의 단짝 친구는 평화로운 게 "사랑하는 엄마랑 좋아하는 책을 보면서 천천히 마시는 우유 같은 거"라고 말한다. 문득 내가 평화롭다고 느낀 순간순간들을 떠올리다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돌아보면 나의 그 순간들에는 언제나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20대의 나는 이루지 못한 것들에 아쉬워하느라,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지려 하느라 평화로움이 뭔지 잊고 살았다. 아이를 낳고도 회사생활과 육아에 치여 다 잊고 사는 줄 알았다. 육아휴직을 하며 이제야 겨우 조금 여유로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평화를 실감하지 못했을 뿐, 우리의 평화로움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주말 아침 느긋하게 자고 일어난 이불에도, 후후 불며 함께 마시는 보리차에도, 역할을 나누어 깔깔대며 읽는 책 속에도, 서로 마주 앉아 책을 읽는 테이블에도, 손을 잡고 걷는 유치원 길에도 평화는 있었다. 나는 몰랐는데 아이는 알게 된 평화로움은 얼마나 될까. 나는 몰랐는데 아이는 깨달은 행복은 얼마나 될까 생각하니 아이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나보다 31살이나 어린 친구를 통해 인생을 배우고, 때로는 나를 키운다. 이런 날이면 "나 같은 딸, 나를 닮은 딸"이라는 말조차 미안해진다. 아이는 이미 나보다 훨씬 깊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또 그렇게 나도 크고, 너도 크고 하는 게 육아지 뭐 별다른 게 있겠냐는 뻔뻔한 생각도 든다. 나는 참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온 세월이 많다. 나보다 나은 형제들에 치여, 나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노력해도 이루는 게 없는 듯한 초조함 속에서. 그런데 이런 나에게서 이렇게 느긋하고 천사 같은 아이가 태어난 것을 보면, 자신의 속도대로 잘 성장하는 것을 보면 내가 그렇게 한심한 편은 아니었다는 위안도 든다. 좋은 엄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이의 좋은 친구가 되리라는 마음으로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