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하게 무너지다

by 연승


2차 항암치료를 마치고 휴가를 왔다. 이미 항암제로 망가져 버린 몸으로 이전과 같은 휴가를 즐길 수 없었다. 손가락에 있는 신경계가 망가져 감각을 잃었다. 젓가락질을 할 수 없어 포크로 음식을 먹었다. 손을 절대로 멈춰 선 안 된다며 신신당부하는 의료진 선생님들 말을 새겨듣고 어떻게 하면 계속해서 손가락을 사용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던 중 키보드를 하나 구매해서 타자 연습을 했다. 손에 감각이 없으니 타자 치기도 힘들었다. 마치 장갑 여러 겹을 끼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손에 있는 감각이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며 마사지하고, 최대한 열심히 움직이려 노력하며 휴가를 보냈다. 추운 겨울이 다가왔고, 하늘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추운 날씨에 감기에 걸릴까 꽁꽁 싸매고 병원을 다녀왔다. 어느 순간부터 추위를 견디는 게 정말 힘들어졌다. 3차 항암치료를 시작하려고 입원 준비를 마치고 병원으로 갔다. 이번 항암치료를 잘 마치면 앞으로 골수이식을 받으면 정말 힘든 치료는 마무리되기에 마지막까지 최대한 노력해서 버티기로 했다.


나는 일란성 쌍둥이기 때문에 골수이식에 큰 걱정이 없었다. 동생의 골수(조혈모세포)를 이식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식받을 수 있는 확정된 골수가 있다는 게 너무 부럽다고 이야기했다. 대부분의 환우는 본인의 유전자와 맞는 골수를 찾기 힘들었고, 제때 이식받지 못해 결국 본인 골수를 이식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식의 골수는 50% 일치하기 때문에 반 일치 이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당연히 100% 일치하는 골수를 이식받는 게 가장 좋았다.


그런데 주치의 교수님이 한국에선 사례가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자고 하셨다. 일란성쌍둥이가 T세포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에 걸린 경우는 내가 한국 최초였던 것이다. 한국 최초로 일란성쌍둥이의 골수를 이식받아 생존하면 나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어깨가 으쓱했다. 기필코 생존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굳히게 되었다.


며칠 뒤 교수님은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셨다. 혹시 외국에 사례가 있는지 검토해보고, 여러 논문을 읽어 보고 결정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다른 형제가 있으면 혈액검사를 진행하자고 하셨다.


그렇게 큰형이 혈액검사를 했고, 유전자 100% 일치했다. 이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불행했던 내 인생에서 행운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왕 골수이식받는 거 큰 형의 골수보단 나랑 똑같은, 내가 제일 아끼는 분신 같은 동생의 골수를 받고 싶었다. 동생의 따뜻한 피가 내 몸 안에 있다면 뭔가 든든하고, 좋을 것 같았다.


교수님께서 해외 논문과 일란성쌍둥이 결과를 가지고 오셨다. 쌍둥이의 이식은 5년 생존율이 너무 낮았고, 재발 확률이 높았다. 새로운 골수와 기존의 골수는 이질적인 면이 있어야 암세포를 잡아낼 수 있다. 만약 내가 동생의 골수를 받게 된다면, 암세포는 나의 골수로 인식을 하고 전부 잡아먹게 될 것이라 설명해 주셨다. 즉 동생 골수는 이식받아봐야 암세포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동생의 골수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형의 골수를 받을 수 있다는 행복, 이식거부반응에 대한 두려움 등 그때 나의 심정은 만감이 교차했다.


병실에서 환우분들이 큰형의 골수를 기증받는 것에 대해 축하해 주셨다. 그리고 3차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엄마는 나의 병간호를 계속해왔고,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래서 동생이 학기를 마치고 겨울방학을 맞이해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너무나도 추웠던 겨울 2015년 12월 20일 오른쪽 배에 통증이 시작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정도 남겨두고 레지던트와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배가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내가 화장실을 제때 가지 않아서 아픈 것이라고 설사약과 진통제를 처방해 주셨다. 동생이랑 매일 장난을 치며 병원 생활을 하니 지루하지 않았고, 통증은 진통제로 잡히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날 교회에서 케이크를 들고 병문안을 왔다. 병실엔 면역력이 저하된 환자분들이 많았기에 1층 로비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 응원해주니 힘도 넘쳐났고, 차가운 바람보다 따듯한 바람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배가 살짝 아픈 것 말고 수치도 점점 바닥을 치고 있어서 조만간 퇴원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마스크 잘 쓰고 다음 주 2016 송구영신 예배에서 보자는 말을 했다. 받은 케이크는 간호사 선생님들과 나눠먹으며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12월 31일 저녁 수십 번의 구토를 했고, 우측 배의 통증은 더 심해졌다. 아무리 진통제를 먹어도 통증이 완화되지 않아 스스로 큰일이 났음을 감지했다. 응급으로 CT 촬영을 요청했고, 새벽부터 물을 포함해 모든 음식을 먹지 못했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맹장이 터져 지금 당장 수술을 해야 했다. 안 좋은 일은 한 번에 온다고 했던가 호중구 수치는 0으로 바닥을 쳤다. 평소였으면 곧 집에 가겠구나 싶어 기분이 좋아야 했는데, 하필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수치가 0이 된 걸 확인한 나는 절망에 빠졌다. '그래…. 나는 애초에 운이 없었잖아'


신년을 맞이해 병원에 상주해있는 의사 선생님이 많이 없었다. 심지어 내 옆엔 엄마도 없었다. 주치의 교수님도 없었다. 외과 담당 주치의 교수님의 전화 한 통이 뿐이었다. 수술 집도는 실력 있는 레지던트가 할 예정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 후 서류 2장이 나에게 도착했다. 수술이 잘못되어도 병원 책임이 아닌 것을 확인시켜주는 종이였다. 나는 종이에 사인 한 번으로 내 목숨을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지금 호중구가 없어서 아무리 깔끔한 환경에서 수술해도 감염이 불가피합니다.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수술하면 제일 좋은데, 현재 맹장이 터져 염증이 대장까지 번질 수 있는 상황이니 바로 수술을 해야 합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은 나는 수술을 해도 감염으로 죽을 것이고 안 하면 충수염으로 죽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측 배에 통증이 너무 심해 기다릴 수 없었다. 당장 수술을 해야겠단 생각에 혼자 두 장의 서류에 서명했다. 사람은 이렇게 죽는구나 너무 무서웠고, 외로웠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몇 시간 뒤 교회 목사들과 부모님이 급하게 병원으로 왔다. 갑자기 수술을 해야 한다니 모두가 놀랐던 모양이다. 나는 수술실 바로 앞까지 목사님 기도를 받으며 도착했다. 이제부터 보호자 입장이 안 되니 혼자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통증 때문에 걷기가 힘들어 휠체어를 끌고 가는데, 갑자기 너무 억울했다. 계속해서 아프다고 이야기했는데, 설사약에 진통제만 처방해준 의사 선생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나는 도저히 이렇게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다. 씩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처음으로 목사님 앞에서 욕을 하며 소리쳤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런 안 좋은 일들만 나에게 일어나는 거죠? 정말 하나님이 계신다면 나에게 이런 큰 시련은 없어야 합니다. 나눠서 오는 불행은 감당할 수 있지만, 악재가 한 번에 덮치니 한계에 부딪힌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일도 많은데 이렇게 죽기 싫어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나는 수술실로 휠체어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혼자 추운 수술실 앞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눈물범벅이 되어 유난히 더 춥게 느껴졌다. 이젠 통곡하며 울어도 소용없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어머 연승 씨 안녕하세요? 저 기억나세요? 84 병동에 계실 때 1차 항암치료를 도와준 간호사입니다. 힙합을 좋아하셔서 매일 멋있는 모자를 쓰고, 일란성쌍둥이 동생이랑 즐겁게 다니던 모습이 아직 기억이 나네요, 오늘 제가 수술에 마취를 담당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지독하게 외롭고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나에게 간호사 선생님이 따듯하게 다가왔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서러움이 폭발하며, 나는 대성통곡을 했다.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 진짜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수술실에 옆에 있어 준다니 외로움이 덜해졌다. 그렇게 아주 차가운 수술대 침대에 천천히 올라왔다. 마취 1단계, 2단계 제발 눈이 떠지길 기도 하며 천천히 호흡하며 두 눈을 감았다. 정신이 몽롱하며 눈이 떠졌다. 이곳은 회복실이니 천천히 호흡하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두 눈이 떠진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진통제를 투여했으니, 더 아프면 말하라는 말과 함께 나를 병실에 옮겨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2시간 30분이면 끝날 수술을 나는 6시간 넘게 했다고 한다. 그동안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애가 탔을지 상상이 안 간다. 다행히 수술은 잘 마무리되었고, 나는 병실로 왔다. 새벽이 되자 말도 안 되는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너무 괴로워 마약성 진통제인 모르핀을 처방받았다. 통증은 아주 잠깐 잡혔고, 구름에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통증이 없으니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마저 생겼다. 지속해서 모르핀을 맞게 되면 의존성이 심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약 효과가 떨어지자마자 통증이 더 심하게 느껴졌다. 항암제 부작용으로 구토는 계속 나왔고, 그때마다 온몸의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정신력 하나로 버텨내는 것뿐이었다.


나의 가슴엔 항바이러스제, 항생제, 비타민, 단백질, 혈소판, 헤모글로빈 등 족히 열 개가 넘는 주사가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혈관 속엔 수십 가지의 약물이 흐르고 있었다. 과연 내 혈액엔 정상적인 피가 흐르고 있을까? 나는 약물로 인해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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