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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예지 Sep 22. 2022

“본래의 가치를 찾아주기”

편지 가게 ‘글월’ 문주희 대표


1)이름 : 문주희
2)프로필 : 잡지사 에디터 출신. 2019년 서울 연희동에 편지 가게 ‘글월’ 오픈. 편지와 관련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19년 봉투북스를 론칭, 작가 남하의 20대 시절 8년 연애사를 편지 50편에 담아 <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를 발간했다.
3)직업 : 편지 가게 ‘글월(geulwoll)’ 대표, 출판사 봉투북스 운영
4)대표 서비스 및 출간 도서 : 펜팔 서비스 및 레터 서비스, 출간 도서 <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
5)인스타그램
- 글월 : https://www.instagram.com/geulwoll.kr/(10.6K의 팔로워)
- 봉투북스 : https://www.instagram.com/bongtoo.books/ (175명의 팔로워)
6)홈페이지 : https://www.geulwoll.kr/shop





“본래의 가치를 찾아주기”

편지 가게 '글월' 문주희 대표


연희동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다

2020년 초, 해가 바뀔 때쯤 세 번째 기획사 생활을 마무리했다. 회사를 그만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느닷없이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로 야기된 내외적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하겠다는 마음으로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죽겠다’는 소리가 입버릇처럼 터져 나올 때쯤 홈트를 시작했고 떨어지는 체력을 가까스로 붙들어 매며 글을 완성했다. 그러나 계약된 출판사는커녕, 제안을 한 출판사에서 거듭 거절의 메일이 날아왔다. ‘이게 무슨 막무가내인가? 애초부터 미친 짓이었다’며 자책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정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초여름의 어느 날, 그런 고군분투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친한 지인이 홍대로 불러냈다. 장르소설을 쓰는 작가 분으로, 그즈음 그는 신간 장편소설을 출간한 직후였음에도 계약된 신작 원고를 줄줄이 처리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자신의 귀하디 귀한 작업 시간을 나를 위해 뭉텅 떼어내 준 것이다.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데도 구경하며 힐링 좀 해요.”

‘힐링’이 이렇게나 달콤한 말이었다니! 나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이탈리아 파스타 ‘뇨끼’를 사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후덥지근했지만 걸을만한 날씨였고, 우리는 홍대역에서 만나 약속 장소인 연희동으로 걸어가며 차분히 근황을 나누었다.  

“예지 씨. 레스토랑이 평일에는 늦게 오픈하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근처에 아는 에디터 님이 운영하는 가게를 잠깐 들러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오, 그럼요. 무슨 가게예요?”

“음, 편지 가게? 편지와 관련된 제품을 파는 곳이라 하더라고요. 연희동 가는 김에 겸사겸사 들렀으면 해서요.”

“와! 좋아요.”


홍대 옆 연희동은 두세 번밖에 가보지 못했다.  첫 기획사에서 기획자로 근무할 때 미디어시티역에 있는 거래처로 촬영을 나갔다가 포토 실장 님과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들른 곳이 연희동의 한 중국집이었다.  우육탕면 한 젓가락을 막 입에 넣었을까, 사무실로 복귀하라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돌아가 봤자 퇴근 시간일 텐데도 기어이 복귀하라는 말에 알 수 없는 저항감을 느낀 나는, 포토 실장 님이 반주로 권한 고량주 두 잔을 거절하지 않고 비웠다. 멀끔한 얼굴로 사무실에 가긴 했지만, 저항감 없이 받아 마신 고량주가 내내 ‘죄책감’으로 남았다. ‘일과 시간에 술이라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량주는 여전히 독하고 달구나, 인생처럼.’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 그때가 연희동을 마지막으로 갔던 날인가?


아니다. 충무로의 첫 번째 기획사를 퇴사해 합정동 시절을 거쳐 연남동의 마지막 기획사를 다닐 무렵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과 퇴근 후 홍대에서 만나 데이트를 한 적이 있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던 나는 그때 먹었던 우육탕면이 갑자기 먹고 싶어 져서 (그 사이에 무려 7-8년의 공백이 있었음에도) 무작정 연희동에 가자고 했다.  결국, 중국집의 이름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탓에 애먼 간판만 훑다가, 결국 눈에 띄는 (아무) 중국집에 들어가 (무난한) 메뉴를 주문했다. 더위를 쫓을 시원한 칭따오를 성급히 들이켜다가 연희동은 별로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을 소환하게 한다고 중얼거렸다. 그렇고 그런 낡은 추억들이 덧대어지자 여전히 연희동은 이상하게 남루하고 오래된 풍경들이 존재하는-서울에 몇 남지 않은 아날로그 감수성을 가진-동네로 남게 되었다. 적어도 그날까지는 그랬다.


작가 님도 연희동은 자주 가보지 못한 동네라며, 홍대에서 연희동 방향으로 걸어가는 동안 지도 어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이십 여분쯤 땀을 흘리며 걸어왔을 때, 우리는 오래된 소형 아파트 단지 맞은편에 위치한 낡은 상가건물 앞에 도착했다. 위치 정보가 알려준 대로 2층에는 피터팬 1978이라는 빵집이 있었다.


“근데, 가게가 4층이라네요. 엘리베이터는 없는 것 같고요.”

“괜찮아요. 빨리 올라가 봐요.”


사실 괜찮지 않았다. 하필 맨발에 플랫 샌들을 신었는데 연희동 삼거리를 지날 무렵부터 뒤꿈치가 욱신욱신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아니,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이를 테면 벗겨진 뒤꿈치처럼 약하디 약한 내 모습을.  걸어오는 내내 작가 님의 한결같은 따뜻함에 대책 없이 마음이 몽글몽글해져 버린 탓도 있었다. 이러려고 프리랜서를 선언한 게 아니었고, 이러려고 글을 쓸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니었으므로.


그래서 작가 님을 따라 한 칸 한 칸 계단을 올라가면서 발끝에 조금씩 힘을 실었다. 뭔가 이 건물 4층에서 새롭고 근사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서. 굳게 닫힌 철문 앞에서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지만, 문을 여는 순간 어쩐지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차분한 살구색의 내벽과 편집숍을 연상시키는 원목 가구들, 공간의 중심을 차지한 근사한 원목 쇼케이스, 쇼케이스 속을 칸칸이 채운 다양한 디자인의 편지 봉투와 편지지, ‘편지’를 매게로 셀렉 된 서간문의 책들,  모든 요소를 아우르는 공간의 이름이자 편지의 순우리말을 뜻하는 ‘글월(geulwoll)’까지. 그곳은 좁지만 아늑하고,  사람들의 번잡한 ‘말소리’가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편지 속 ‘글소리’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글월에 머문 시간 동안, 나는 형용할 수 없는 따스한 위로를 받았다.



편지지와 편지봉투 전용 쇼케이스. 글월의 시그니처. @류예지




원목 쇼케이스에 전시되듯 구비된 다양한 편지지 @류예지


레터 서비스와 펜팔 서비스, 편지는 ‘형식’ 일뿐

글월은 2019년 연희동에 문을 열었다. 글월의 문주희 대표는 잡지사 에디터 출신으로, 그때의 경험을 통해 다양하게 사람을 만나 글로 기록하는 ‘인터뷰’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임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주력 분야인 ‘인터뷰’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인터뷰 서비스’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학창 시절부터 교환일기나 편지 쓰기를 좋아했던 경험을 이 서비스에 접목하기에 이른다.


“레터 서비스는 편지를 통해 인터뷰를 받아볼 수 있는 서비스예요. 지금은 준비 중이고요. 일상 속에서 그냥 흘려보내는 일이나 본인의 중요한 시작과 끝이 있을 때를 대신 기록하는 방식인데, 그 형식이 편지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인터뷰로 기록하고 싶었지만, 인터뷰로 기록하는 것 자체가 딱딱하다고 느껴져서, 편지가 가지고 있는 사적이고 따뜻한 부분을 드러내고 싶어서 처음에 편지를 떠올렸던 것이고요. 가게를 하면서 지금 이 시대에 편지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저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아임 웹 인터뷰(2019) 중에서


그것이 글월의 초기 서비스인 ‘레터 서비스’였다. 바로 일반인 손님이 주제를 선택하면 문주희 대표가 1시간 정도 인터뷰를 하고 그 녹취록을 바탕으로 글을 작성해 ‘편지’ 형식으로 손님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서비스 형식을 고민하다 보니 인터뷰를 쓸 편지 봉투와 편지지, 동시에 인터뷰를 하고 편지와 관련된 문구와 제품을 판매할 공간이 필요해지면서 자연스레  오프라인 숍 ‘글월’을 열게 되었다. 현재 글월은 레터 서비스의 플랫폼을 달리해 ‘1월에 쓰고 6월에 받는 편지’를 운영 중이다. 이는 한 해의 시작인 1월 한 달간 글월에서 쓴 편지를 한해의 중반 무렵인 6월에 우표를 붙인 편지의 형태로 다시금 받아보는 서비스다. 글월은 ‘인터뷰’, ‘기록’이라는 자칫 딱딱해 보일 수 있는 형태로 작성된 이야기를 ‘편지’라는 형식으로 새롭게 환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글월에는 또 하나의 시그니처 서비스가 있다. 바로 익명의 사람들과 주고받는 ‘펜팔 서비스’.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발신인과 수신인을 정확하게  지정해 자신의 사연을 전달하는 것이지만, 이 펜팔 서비스를 이용할 때만큼은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지 않아도 된다. 오로지 ‘이야기’로 소통하는 익명의 사람들이 펜팔 서비스의 이용객이므로. 이 서비스를 통해 소비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편지’를 쓴 익명의 발신자의 사연에 공감하기도 하고,  스스로 익명의 발신자가 되어 익명의 수신인을 위로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나 역시 학창 시절에는 친한 친구와 교환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주고받았다. 같은 반 혹은 다른 반으로 흩어져버린 친한 친구와 비밀 일기나 편지를 주고받은 일은, 대입 중심의 갑갑한 규율과 통제를 견디게 해 준 숨구멍 중의 하나였다. 사회에 나와 기획자로 일을 할 때에는 테마가 있는 명사를 인터뷰하는 코너를 유독 좋아했다. 그런데 매호 콘셉트를 정하고, 주제에 맞는 인터뷰이를 섭외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갈수록 어려움을 느꼈다. 인물의 배경을 조사하고 시의적절한 질의서를 준비하는 일이 힘에 부쳤다. 인터뷰 칼럼을 준비하면서 ‘글 쓰는 기술’만큼은 성장했지만 명사에 대해 심사숙고할 시간이 물리적으로 넉넉하지 않아, 매번 인터뷰이 앞에만 서면 괜스레 주눅이 들었다. 내겐 ‘정확한’ 질문을 던져야 ‘원하는’ 답변이 돌아온다는 나름의 철칙과 같은 기준이 있었고, 대부분 유연하고 포용력이 있는 인터뷰이를 만난 덕분에 유쾌하게 인터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바쁜 일정 속에서 피상적 정보만을 쫓았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을 ‘제대로 알고 소개한다’는 기분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좋아하는 일인 만큼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두 번째 기획사를 퇴사한 후 독립출판으로 인터뷰집을 출간했다.  문주희 대표처럼 나 역시 ‘인터뷰’를 좋아했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책 판매와 상관없이 만드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던 작업이었다. 각자가 선택한 형식이 ‘책’과 ‘편지’였다는 차이점이 있었으나, 책이라는 결과물로 만들었기에 얻은 성과도 있었다. 반면,  내가 미처 알지 못한 편지라는 형식을 선택한 문주희 대표를 통해 동일한 장르(인터뷰)를 대하는 동종 업계 종사자의  ‘다른’ 관점을 배우기도 했다. 그것은 ‘인터뷰’라는 장르에, 지금은 잘 쓰지 않는 ‘편지’라는 형식을 접목함으로써 새로운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전환점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데 고정된 ‘형식’을 둘 필요는 없다는 것, 중요한 건 본연의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는 일에 있다는 점이 그렇다.


‘편지’의 가치를 경험, 확장하는 브랜드 정체성

글월은 현재 기준 팔로워 수가 1만 명을 넘고, 연희동 본점 외에도 성수동 LCDC 3층에 성수동점을 낼 정도로 성장 중이다. 그럴 수 있었던 데는 글월이 편지와 관련된 ‘제품’과 ‘서비스’만을 파는 온, 오프라인 공간이라는 점을 넘어, 다양한 브랜드와의 활발한 협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편지’를 탐구하는 새로운 도전에 임했기 때문이다.


글월의 첫 협업은 스테이셔너리 브랜드 웬아이워즈영 과 함께 했다.  2019년부터 2021년까지 3 시즌에 걸쳐 ‘STAMP TO STAMP’ 팝업을 진행한 것. 2019년 첫 팝업에서 두 업체는 200여 개의 독일 빈티지 F.D.C 봉투와 캐나다 및 미국 우표를 통해 우표가 지닌 숨겨진 가치를 재조명하고, 편지와 관련된 제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자리를 가졌다. 글월은 이 팝업을 통해 협업이 가능한 브랜드라는 인식을 대외적으로 알렸다. 그 덕분에 현대백화점(판교) 크리스마스 기프트 페이지 행사 중의 하나로  ‘편지 세트’를 기획해 참여했고, 문학동네와 같은 대형 출판사와 함께 신간을 편지로 소개하는 편지 서비스를 운영, ‘편지’를 다양한 분야와 접목하는 시도를 꾸준히 이어올 수 있었다.  2022년 여름, 글월은 프랑스 출신 아티스트 요한나 타카다 호프벡 작가의 국내 첫 전시회 ‘종이로 말하기(Speaking with Paper)’ 를 기획했다. 이는 ‘종이’에서 영감을 얻은 콜라주 작품과 스케치북/편지 세트를 전시/판매하며 국내 브랜드뿐만이 아닌 해외의 아티스트와의 협업 사례를 한 차례 더 대외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해당 전시회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편지’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물성으로서 ‘종이’의 가능성과 매력을 소비자에게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글월의 확장성을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글월이 이룬 또 하나의 쾌거라면 ‘봉투북스’라는 이름의 자체 출판사를 운영 중이라는 것이다. 봉투북스는 2019년 12월 <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라는 제목의 첫 독립출판물을 출간해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입소문을 탔다. 이 책은 저자인 남하 작가가 20대 시절 -지금은 아내가 된- '희'와 주고받은 연애편지 50편을 모은 서간문으로, 독립출판물계에서는 이례적으로 5쇄라는 판매고를 기록하며 지금까지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제는 책을 읽고 글월을 방문하는 독자들도 생겨났다고 하니, ‘편지’의 가치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하고 고민해온 글월의 활동이 선순환을 이룬 결과일 것이다.


추신 : 꼭 편지할게요, 내일 또 만나지 못할 수도 있기에


글월의 패키징. 문주희 대표의 실수로 작가님이 구매한 거래명세서와 바뀌었다는 사실을 집으로 돌아와서야 알았다. 그것도 추억이려니 싶어 교환하지 않고 그대로 보관했다. @류예지
Postcard 2종(blue summer/yellow summer)과 Postcard/Beckett.  스토리지북앤필름 강남점에서 구입한 책 @류예지


그날, 순전히 색감에 반해 ‘여름을 위한 첫 번째 엽서 시리즈’로 제작된 blue summer, yellow summer Postcard 2종, 사무엘 베게트와 프랑수아즈 사강의 사진이 들어간 Postcard를 각각 1종씩 구입했다. 문주희 대표와 근황을 나누는 작가 님의 말소리가 고요히 공간을 채우는 동안, 몇 분의 고객이 제대로 된 간판도 없는 글월의 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모두들  원목 쇼케이스를 가득 채운 편지 제품들을 보며 낮은 탄성을 질렀다. 먼저 그 공간에 도착한 우리가 그랬듯이.


“이렇게 예쁜 편지지는 처음 봐! 편지 쓰고 싶어 졌어.”


우리는 글월을 나와 근처의 카페로 이동해 커피를 마셨다. 작가 님의 신간에 사인을 받으며 수다를 떨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오픈 시간에 맞춰 자리를 옮긴 긴 후 레스토랑의 첫 손님이 되어 따뜻하고 부드러운 ‘뇨끼’를 먹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레스토랑 밖으로는 여름을 알리는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글월에서 받은 기분 좋은 위로, 부드러운 뇨끼, 작가 님의 따뜻한 응원을 에너지원 삼아,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첫 책 계약을 이루어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방금 과거로부터 온 편지 한 장을 받은 것처럼 가슴이 뭉클해져 온다.


그날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추신처럼 덧붙이자면, 구입한 카드에 손 편지를 받고 싶어서 당시 남자 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에게 노란색 카드를 선물했다. 기념할 날이 오면, 꼭 이 카드에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고, 글월에 다녀온 지 한 달 남짓 지난 어느 날 700일 기념 메시지를 받았다. 카드에는 이 글에는 담지 못할,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짧지만 많은 의미를 품은 말들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연애 기간 동안 제법 많은 손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대형 서점이나 마트의 문구 코너가 아닌 ‘편지 가게’라는 정체성을 공고히 내세운 ‘글월’에서 구입한 카드에 쓴 편지를 주고받은 ‘경험’은 새삼스럽게 ‘우리가 편지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 대답을 봉투북스에서 출간된 <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에 수록된 1988년 2월 7일에 쓰인 편지에서 발견한다.


봉투북스에서 출간한 <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 86-87p에 스캔하여 수록한 편지글  @류예지



아름다움은 먼발치로 물러서 버리고 시선 없는 눈초리로 허전함 자체, 정의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음을 자신이 이미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며, 사랑, 행복이란 말도 아직 꿈꾸기엔 너무나 요원한 듯만 하여 무섭고, 꿈은 너무 비현실적이며 반항은 당장의 불이익을 초래하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림은 모든 사람을 피하여 고립으로만 흐르고, 여럿과 어울림은 가식 있는 허울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거꾸로 흐르는 것도 아니니 삶을 살아봄직 한지도 몰라. 잘 산다 잘 나가다 왜 이런 말들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보통 사람은 위대하지 않아. 한 사람의 지탄받는 반항 기질 지닌 사람이 훨씬 위대하고 혁신적이며 적당한 제스처와 눈웃음으로 세상을 희롱하고 가지고 놀 새끼. 참 사랑 한단 말도 너무 자주 하려니 말의 뜻이 반감돼버린 것 같다. 오늘은 가슴속에 묻어두기로 했어. 이런 편지는 괜히 네게 부담만 줄 것 같아 안 쓰려고 했는데 나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 원래가 마음이 약해서인지 취미가 없어서 인지는 몰라도 용납 못한 성격이라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지 마 이 편지에서, 절대로.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에 있지 않다고만 느껴줬으면 해. 더 쓰고 싶고 희한테 그냥 넋두리라도 애교스럽게 쏟아 버리고 싶은데 바보스럽게 생각할까 걱정되어 여기서 끝맺기로 해. 지나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살고 사랑하고 싶다.

널 사랑해.



다양한 플랫폼이 나타났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시대, 낡고 오래된 풍경을 지우고 새로운 랜드마크를 조성하기 위해 애쓰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편지’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는 생각해본다. 이제는 ‘쓰는’ 행위조차 드물게 ‘경험’ 해야 할 일이 되어버린 현실 앞에 편지 쓰기를 다시금 재현하려는 사람들의 방문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연희동의 낡은 소형 단지 아파트 앞 간판도 없는 건물에 자리한 ‘글월’을 떠올린다. 멀지 않아 분명한 사실을 알아챈다. 형태만 바뀔 뿐, 온전히 사라지기는 어려운 것이 있다고. 우리에겐 접속하기 편리한 ‘톡’과 메시지 전달이 용이한  ‘DM'이 있지만, 정작 전하고 싶은 말은 그 방식을 통해서는 잘 전해지지 못한다고. 설령, 전달된다 한들 그것을 진심으로 여기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그러니 여전히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의미를 오롯이 상대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손’으로 꾹꾹 눌러쓰는 기회를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글월을 통해서 우리는 편지의 본래적 가치, 오늘 헤어지면 내일 다시 만나게 될 지조차 알 수 없는 시대 속에서 힘겹게 분투 중인 당신의 안부를 묻고 싶은 것이라고. 글월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우리는 진짜 ‘메시지’를 발신하고 수신하는 법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Cover Image 출처  : 글월 공식 홈페이지 : https://www.geulwoll.kr/about

원고 참고

- 서울문화재단 : https://blog.naver.com/i_sfac/222594978832

- 리빙센스 :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2573863&memberNo=25516952&vType=VERTICAL

- 더아이콘티비 : https://blog.naver.com/theicontv_/2216598062


- 유튜브 아임웹 : https://youtu.be/Z-BQa8Q7s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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