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예지 Sep 29. 2022

“자신만의 해석법을 더해 힘껏 사랑하기”

책 수선가 ‘재영 책수선’ 배재영 대표

1)이름 : 배재영
2)프로필  : 순수미술과 그래픽 디자인 전공. 2014년 미국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북아트와 제지(Papermaking)를 공부했다. 졸업 후 대학교 내 ‘책 보존 연구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책을 다루는 일을 하며 3년 6개월을 보냈다. 그곳에서 2,000여 권의 책을 수선한 경험을 토대로 2018년 2월 서울 연남동에서 ‘재영 책수선’을 열었다. 2021년 10월, 그간 의뢰받은 파손된 책들을 보고 만진 기록을 담은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을 출간했다.
3)직업 : 책 수선가,  ‘재영 책수선’ 대표
4)대표 저서 :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5)공식 홈페이지 :  http://book-conservation.com/
6)SNS : 트위터 @pencilpenbooks(2.3만 명), 인스타그램 : @pencilpenbooks_jy (4,771명)


“자신만의 해석법을 더해 힘껏 사랑하기

책 수선가 ‘재영 책수선’ 배재영 대표


‘내 것 화’ 가능한 새책이 좋았던 이유

‘새책’을 좋아한다. 누군가 단 한 번도 밟지 않은 눈길에 첫 발자국을 남길 때 묘한 희열을 느끼는 사람처럼, 책에 대한 접근 방식이 그렇다. 인쇄소에서 막 출간되어 서점이나 책방으로 갓 배본된,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아 반질반질한 표지와 빳빳한 속지의  ‘새책’을 구입한 후 내키는 속도로, 나만의 흔적을 남기며 ‘내 것’화하는 과정을 좋아한다. 책 읽는 속도도 느린 편이고,  여러 권의 책을 번갈아가며 메시지를 습득하는 데 영 재주가 없는 나는, 한 권의 책을 오랫동안 음미해야만 겨우 책이 전하는 의미를 간파하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대여 기간이 정해진 도서관 대출이 불편하다. 몇 가지 이유를 들자면, 일단 2주라는 대여 기간이 너무나 짧다는 점(동의할 수 없다고요? 이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에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는 사람도 있는데요?), 읽는 내내 종이 단면에 어떤 흔적도 남길 수 없다는 점(동의한다고요? 그런데 꼭 너저분하게 읽어야만 책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건 어불성설 아닌가요?)에서 ‘도서관’은 (내겐) 너무나 괴로운 대여 시스템을 가진 공간이다. 그러다 보니 도서관의 책들은 자료 참고용으로 주로 활용하고, 웬만해서는 직접 구입하여 읽는 편이다.  어떤 면에서는 책을 지저분하게 읽는 데 익숙해진 탓에 중고 서점의 합리적인 가격을 이용해도 좋을 법한데, 중고 도서는 책이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선뜻 마음을 내어주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중고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고도 펴보지 않는 일이 다반사요, 대부분 서가 한편에서 잠자듯 놓여 있다가 때가 되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지인을 기다리느라 회사 역 근처 알라딘 중고 서점에 들어간 적이 있다. 약속 시간까지 한참 남은 터라 무료함을 달랠 요량이었는데 도서관 서가처럼 정돈된 서점의 풍경에 이내 마음이 바뀌었다. 특히 에세이 서가에는 육안으로 봤을 때 새것이라 해도 무방한 책들이 누군가의 손을 ‘잠시’ 탔다는 이유만으로 정가의 7~80% 수준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구입 욕구가 솟아올라 에세이 서가를 돌며 몇 권의 책을 저울질하다가 (가방 무게를 고려해) 읽고 싶었던 한 권의 책을 신중히 구매했다. 중고서점에서 구입하는 것이 어쩐지 어울릴 법한 제목을 가진 책으로, 그것은 바로 ‘재영 책 수선’의 배재영 대표가 쓴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이었다. 누군가의 손때 묻은 책을 발견한 순간, 그 누군가의 역사까지 파도처럼 떠밀려와 전달된 기분이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류예지


재영 책수선을 알게 된 건 몇 달 전 채널예스에 올라온 배재영 대표의 인터뷰를 보고 난 후였다. 그 후 인스타그램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별점을 매기는 책 인플루언서 분이 해당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며 남긴 후기를 보았다. 배 대표의 활동을 눈여겨본 것은 다름 아닌 ‘책 수선가’라는 낯선 직업을 가졌다는 것, 그가 어떤 경험을 통해 해당 직업을 갖게 되었는지,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책 수선’이라는 ‘분야’를 국내에서 어떻게 선보이고 정착해나가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더불어 그가 다룬 책에는 얼마나 다양한 ‘책 주인’의 사연이 있을지, 이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오롯이 느껴보고 싶었다.


복원과 수선 사이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는 일

재영 책수선의 배재영 대표는 순수미술과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후, 그래픽 디자이너와 BI디자이너로 일해왔다. 그러다 2014년 미국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면서 북아트와 제지(Papermaking) 분야를 새롭게 공부하게 된다. 졸업 무렵 배 대표는 자신이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스크린 상으로만 편집 작업을 해왔을 뿐 디지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수하게 맨손으로 책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난감함을 학과 지도 교수와 논의했을 때, 그의 제안은 바로 이것이었다.

대학교 도서관 내 ‘책 보존 연구실’에 취직해, 책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일을 해볼 것.


연구실에 취직한 그는 계획보다 열 배나 더 긴 시간인 3년 6개월 동안  파손된 책과 희귀 서적을 직접 수선/보존하는 일을 배우며 ‘책’이라는 물성에 직간접적으로 가까워지는 시간을 갖게 된다. 연구실에서 2,000여 권의 책을 수선한 경험을 축적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018년 2월 서울의 연남동에 ‘망가진 책을 수선한다’는 의미를 가진 ‘재영 책수선’이라는 작업실을 열게 되면서 독립적인 책 수선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책 수선가’라는 직업이 많은 매체로부터 관심을 받은 배경에는 무엇보다 국내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생소한 분야라는 점에서였다. 나 역시 그의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미 외국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직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이 바뀌는 순간 새로운 영역을 다루는 직업으로 변모할 수도 있음에 흥미로움이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에는 배 대표가 사업자등록증을 내면서 겪은 초창기의 고충이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세무서 직원들조차도 ‘책 수선’이라는 직업을 어느 업종 코드로 ‘분류’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카테고리화 하기 쉬운 보편적인 직업을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웃지 못할 사연마저도 -지나고 나면-하나의 브랜드 스토리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점은 ‘재영 책 수선’이라는 작업실을 연 후, 각양각색의 사연을 가진 의뢰인의 책들을 다루며 ‘수선’과 ‘복원’ 사이에서 고뇌하는 직업인으로서의 고충을 술회한 부분이다.


배 대표는 되도록 원본보다는 수선이라는 말을 지향한다. 분명한 건, 원래 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을 가진 ‘복원’은 매력적이지만, 원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로 인해 변화의 융통성이 없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한계에 부딪힌다. 시간적/경제적 한계는 물론이거니와 자료가 남아 있는 정도에 따라 작업자가 발휘할 수 있는 영역 전반에 걸쳐서도 다양한 한계가 발생한다. 반면 수선은 작업  결과물이 원래의 모습과 일부 달라질 수 있지만, 그만큼 열린 가능성을 자유롭게 끌어안는 방법이기에 의뢰인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해 준다. 이를 테면 사라진 표지를 의뢰인이 좋아하는 색으로 새롭게 만들어 넣을 수도 있고, 원본에는 없는 색색의 귀여운 요소를 넣어 책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고, 나만의 표식을 넣어 세상에 단 한 권 밖에 없는 책을 만들 수도 있다. 책에서 표현한 대로  ‘열린 가능성’을 자유롭게 끌어안는 방법인 ‘수선’의 개념을 지향하는 배 대표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재영 책수선’이라는 이름의 작업실을 열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에는 할머니가 한국전쟁 때부터 써오신 70년이 넘은 일기장, 귀퉁이가 1센티미터 찢어진 한정판 잡지에 대한 사연을 포함해 총 30개의 사연들이 촘촘히 수록되어 있다. 길게는 100년이 넘었거나 짧게는 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책, 시중에서 여전히 쉽게 구입할 수 있거나 전 세계에 한정판으로 발행된 탓에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하는 책…  이렇듯 저마다의 이유로 망가져버린 후 재영 책수선을 찾아온 책들에는 하나 같이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신의 귀하디 귀한 책에 ‘사랑’을 불어넣어 어떻게든 자신의 곁에 오래 머물게 하고 싶은 의뢰인의 간절한 마음이다. 이 마음까지 두루 헤아리며 ‘언제나 모든 책이 희귀 서적이라는 긴장감’을 놓지 않고, 책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수선 작업을 해나가는 배 대표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책 수선’이라는 생소한 이름에 가려진 다정함과 따뜻함이 살아 숨 쉬는 세계로 소비자들을 끌어당긴다.


책이 가진 기억의 울림을 살피는 일

얼마 전 친구가 내게 한탄조로 이런 말을 했다.


“야야. 내가 진짜 오디오북까지 찾아 듣게 될 줄은 몰랐다니까.”


친구는 ‘모든 분야를 망라해서 읽는 다독가’는 아니었어도 ‘나름대로 자신의 관심 분야만큼은 즐기는 애독자’였다. 한때 우리의 대화는 나름 트렌디 한 에세이나 문학 분야의 책 이야기일 때가 많았다. 그러나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친구는 일과 생활, 자녀 육아를 병행하며 바삐 살아가느라 실제적으로 책 읽기에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 너무나 어렵다고 했다. 친구는 그나마 출퇴근 시간에 오롯이 혼자가 되어 숨을 쉬는 시간이라며, 그럴 때마다 오디오북과 팟캐스트를 가리지 않고 듣는다고도 했다. 무거운 책을 이고 지고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기가 어디 쉬웠을까. 친구는 자연스레 오디오북을 찾게 되었고, 종종 외근을 나가는 길에는 아이패드를 들고 전자책을 읽는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종이책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활용할수록 이북, 오디오북의 간편한 휴대성과 편리함을 포기하기도 어렵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고.


이렇듯 새로운 책 플랫폼의 가파른 출현 속에서 종이책의 입지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들의 곁에는 망가진 책의  다른 이름을 ‘사랑’이라 일컬으며, 묵묵히 ‘책 수선가’로 살아가는 재영 책 수선의 배 대표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또한 그와 같은 활동을 응원하는 나와 같은 독자들이 있고.


“여전히 종이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고 금방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해요. 처음 작업실을 열 때는 옷 수선, 구두 수선을 일상에서 많이 보듯 책도 수선해서 계속 보관할 수 있구나 그 정도 인식만 생겨도 좋을 것 같았죠. 망가진 책 의뢰를 받으면서 느낀 건요. 사실 책 한 권이 그냥 망가졌을 뿐인데 의뢰자분한테는 그 안에 있던 추억이나 기억들이 같이 어수선해진 느낌이었나 봐요. 그래서 정돈된 책을 보고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 옛날 친구가 돌아온 느낌을 받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나는 그냥 책을 고친다고만 생각했는데 누군가의 기억을 보듬어줄 수 있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구나 뒤늦게 깨달았어요.”

-<소년중앙> 인터뷰 글에서


편집 대행사의 기획자로 10년이라는 시간을 살았다. 현업에 종사할 때 늘 인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을 아프게 복기해보자면,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해야 할 ‘직군’을 ‘사양 산업’으로 분류하고, 스스로를 하대하는 문화에 익숙했다는 것이다. 기획자는 기획자끼리,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끼리, 아주 가끔은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한 데 모여 우리의 직업을 폄하하곤 했다. 때로는 거래처 담당자가 ‘웹진’은 기본,  영상’이 대세인 시대에 종이로 된 ‘홍보물’만 만드는 건 시대착오적이지 않냐고 볼멘소리를 할 때마다 ‘종이’라는 물성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좋아하는 내 마음마저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만 같아 우울해지곤 했다.


업무를 하면서 가장 맥이 빠진 순간은, 내 기준 자부심을 갖고 써 내려간 한 없이 짧디 짧은 기사가 어느새 가독성과 주목성을 따지는 거래처 담당자의 입맛을 반영해 이미지 가득한 카드 뉴스로 대체될 때였다. 그럴 때마다 내가 속한 직군과 사양 산업의 뜻을 헤아리며 쓰게 입맛을 다셨다. 나의 직업이 ‘뜨는 해’가 아닌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자주 외로웠지만, 나의 동료들은 꿋꿋하게 현장에서 살아 남아 분투하고 있다. 속도를 모르고 변해가는 세상과 자신만의 속도로 싸워가면서. 그리고 이 ‘책 수선가’라는 자신의 업을, 보다 견고하고 내밀한 정체성 안에서 가다듬으며 ‘사양’이 아닌 ‘가능성’의 영역으로 되돌리는 배 대표의 활동을 바라본다.


보통 책이 망가진 모습을 보면 그 책을 보는 책 주인의 습관이나, 어린 시절 이 책을 어떻게 보고 놀았는지가 보이잖아요. 손을 타지 않았더라도 변색이 되었거나 산화가 되었거나, 그런 파손의 형태들이 단순히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긴 시간 동안 자외선과 습기에 노출되어야 하는데, 그 시간의 축적의 증거물이 이 책인 셈이잖아요. 그게 전 좀 그 경이롭다고 생각해요. 한순간에 이루어낼 수 없는 변화, 그게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정용실의 '뉴스브런치' 중에서


이는 새 책이 아닌, 파손된 책에 고스란히 담긴 '이야기성'에 주목하는 재영 책수선가의 새로운 발견, 세상의 면면을 달리 바라보고 '내 것 화'하는 브랜드를 바라볼 때 소비자로서 느끼는 경이로움이기도 하다. 만약, 세월에 따라 변해갈 수밖에 없는 직군에, 이 직군을 달리 바라보는 자신만의 '해석' 요소를 가미한다면, 사라지지 않는 직군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여전히 자신의 업에 자부심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품게 되는 것이다.


내게 남은 네 권의 오래된 책을 빌어, 내 곁에 없는 한 권의 책을 반추하다

앞서 언급했듯 새책을 좋아하지만,  재영 책수선의 활동을 살피며 묵묵히 서가를 지켜준, 내 기준 가장 오래된 책 네 권을 꺼내왔다. 바로 너무도 사랑해마지 않는 만화가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 4,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어린이 교육 연구회에서 엮은 <벌렁코 할아버지>, 호세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그것이다.


위에서 아래 순으로_벌렁코 할아버지, 사랑의 기술, 호텔 아프리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서가에서 가장 오래된 책을 추려 보았다. @류예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낙서들이 빼곡한 <벌렁코 할아버지> 속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꽂혀 있던 이십 년 가까이 된 친구의 손편지. @류예지


이 네 권은 여전히 서가의 맨 아래쪽에 있는 책들로 80년대 초중반에서 90년대 중반에 출간된 책들이다. 유년시절의 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책들은 나와 함께 조금씩 나이 들어가고 있다. 오랜만에 이 책을 펼쳤을 때, 기억에 조차 남아 있지 않은 그림들과 낙서, 친구가 써준 애틋한 편지 한 통을 발견하고 회한에 젖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각 책들을 적어도 백 번 가까이 펼쳐 보았을 것이다.(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만큼은 제외한다. 이 책과 관련한 한 가지 자랑하고픈 이야기는 첫 회사의 이력서에 필수적으로 첨부해야 했던 리뷰용 과제를 위해 이 책을 정독했다는 것이다. 추후 팀 선배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팀장 님이 그 해의 이력서 중에서 가장 잘 쓴 리뷰를 제출한 지원자가 바로 나였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재영 책수선가에게 찾아갈 정도로 이 책이 낡아버린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에게 이 책을 어떻게든 수선해달라고 의뢰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개정증보판으로 배동바지에서 출간된 <하얀 물새의 꿈>. 고려원미디어에서 나온 내 기억 속 표지와 다르다. @예스24


내게 남은 4권의 책을 들여다보다, 무참히 버린 권용철 작가의  <하얀 물새의 꿈>을 떠올렸다. 아무리 찾아봐도 기억 속 표지가 아닌 개정증보판의 표지로만 존재하는 책인데, 그 책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시내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후였다. 4학년 1학기가 마무리되어가던 무렵 사고를 당한 나는 여름방학 직전까지 꼬박 병실에서 보냈다. 사고를 낸 차량의 운전자였던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 마지막 병문안을 와 내게 선물한 책이 바로  <벌렁코 할아버지>와 <하얀 물새의 꿈>이었던 것.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벌렁코 할아버지>와 더불어 <하얀 물새의 꿈>을 매일매일 읽었고, 어느 순간 책등이 찢어지고 속지가 너덜너덜해진 그 책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날 무렵 엄마에게 버려 달라고 부탁했다.


생각해보니, 그 시절만큼 책 속에 오롯이 파묻혀 지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책을 가까이하는 작가이자 프리랜서 출판 기획자로 살고 있지만, 이따금 책 역시 ‘옷’과 같은 상품으로 여기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옷을 떨어질 때까지 입는 사람이 거의 없듯 책이 망가질 때까지 읽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음으로. 그런데 ‘망가진’ 책을 ‘수선’해서라도 지켜내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만약 그때 그 책을 버리지 않고 간직했다가, 재영 책수선에 이 책을 의뢰했다면 어땠을지를 상상해본다. 모르긴 몰라도 한 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품은 채 새로운 의미를 더한 (나만의) 역사적인 책이 되어 나의 서가를 더욱 풍요롭게 채우고 있지 않을까?


가끔 누군가의 손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책을 볼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서점에 입고될 때까지만 해도 인쇄소에서 한치의 다름없는 디자인으로 한꺼번에 대량으로 제작된 똑같은 책들이지만, 누군가가 사간 이후부터는 어떤 주인을 만나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의 독서 습관으로 어떻게 보관되는지에 따라 실은 점점 각각의 특별한 책이 되어간다.

-'반려책'과도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p.219 중에서


모든 것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순간에도 새로운 ‘의미’를 더해 사라지지 않는 가치로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재영 책수선의 배재영 대표가 그런 가치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의 보이지 않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물성으로서의 '책'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을 것이라는 믿음, 나는 있는 힘껏 '책'을 사랑하는 배재영 대표의 ‘재영 책수선’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그런 희망을 확인한다.



Cover-image : 재영 책수선 공식 홈페이지 http://book-conservation.com/

최신 근황

-채널예스 : http://ch.yes24.com/Article/View/46708 

-국제신문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key=20220110.22018001812

-소년중앙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5/0003096564

-정용실의 책 브런치 : https://www.youtube.com/watch?v=9mo8TXO7v28

이전 05화 “변함 없는 장소로 존재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