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어떤 고난에서도 이겨낼 힘을 얻는 아우라
“도대체 넌 나에게 누구냐?”
<너의 의미> 마지막 부분에, 나지막이 읊조리는 질문이다. 한마디 말과 웃음 그리고 작은 눈빛과 쓸쓸한 뒷모습, 이런 것들이 커다란 의미가 되고 힘겨운 약속이 된다고 노래한다. 그렇게 노래하게 만드는 그 사람에게, 도대체 넌 나에게 어떤 의미냐고 묻는 거다. 사실 그 사람에게 묻는다기보다,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본인이 의미를 다 부여해놓고, 상대방에게 그 의미를 묻는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누군가를 혼자서 마음으로 끙끙 앓다가, 내가 왜 너를 좋아하면서 힘들어해야 하냐고 묻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내가 뭘?”이라는 반문을 받기 딱 좋다.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그만큼 소중하다는 말이다.
소중하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한다. 흔하디흔한 연필 한 자루가 있다고 하자. 그것도 얼마 쓰지 못할 몽당연필이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몽당연필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건네는 몽당연필은 어떤가? 완전히 다르다.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준 연필’이라는 의미 말이다. 회사 생활을 하면 결제 받는 게 일이다. 그때 사인을 받는다. 그 사인은 결제 받았다는 것 이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연예인이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사인은 어떤가? 액자에 걸어놓기까지 한다. 의미가 부여됐기 때문이라는 설명 말고는 더는 할 게 없다.
어떤 물건이든 일이든, 그래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중요하다.
의미는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서 더 좋은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일도 마찬가지다. 일이라고 해서 회사 일이나 생계에 관련된 일만 말하는 게 아니다. 어떤 행위를 하는 모든 것을 일이라고 정의할 때,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천지 차이가 난다. 일에 의미를 부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소개해 본다.
세 명에 벽돌공이 있었다.
열심히 벽돌을 쌓고 있는 이 벽돌공들에서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벽돌공은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두 번째 벽돌공은 “일당을 벌고 있습니다.”라고 답을 했다. 마지막 세 번째 벽돌공은 “저는 최고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라며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답을 했다. 각자가 똑같은 벽돌을 쌓고 있지만, 그 의미를 다르게 담았다. 첫 번째 벽돌공은 말 그대로 행위에 의미를 담았고, 두 번째 벽돌공은 조금 더 나가 하루 일에 의미를 담았다. 하지만 세 번째 벽돌공은 어떤가? 벽돌을 쌓고 있을 뿐이지만, 성전을 쌓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의미를 담았느냐에 따라 성과가 달라졌을 거라는 것은 분명하다. 향후 다른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분명 그 결과가 달랐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내 삶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내가 하는 행동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차이가 크다. 앞서 말한 벽돌공을 봐도 그렇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은,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태도가 다르다는 건,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이겨낼 힘이 있다는 거다. 조그만 바람에도 쉽게 꺼지는 촛불이 아니다.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기는 하지만,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된다. 그런 사람은 감히 어떻게 하기 어렵다. 그 안에서 뿜어 나오는 아우라에 짓눌린다. 같은 일을 한다면, 그런 아우라를 뿜어내는 사람이 멋지지 않을까? 어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먼저 찾는 게 순서다. 그래야 오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