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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Dec 31. 2021

충절의 고향 천안을 가다(1)

홍윤기 수필집 "예순다섯 살의 고교생"_만서 홍윤기

나는 지금까지 60 평생을 살아왔어도 그 흔한 고뿔도 제대로 앓아보지 않았는데 60대 중반을 넘기면서 가끔 그 녀석이 감기라는 이름을 달고 찾아오곤 한다.

<재수 없는 포수는 곰을 잡아도 웅담이 없다>던데 문장가들의 전국 대회를 이틀 앞두고 마침내 또 그 반갑잖은 불청객이 찾아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열이 없어서 머리는 어지럽지 않았으나, 콧물과 기침이 심해 만사가 귀찮은 상태인데 천안을 가야 하나 포기해야 하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몸 상태 때문에 토요일 오전 근무를 포기하고 병원엘 다녀오겠다고 둘러대고 일단 토요일 시간을 확보해 두기는 했지만, 아직도 행사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는 천안행에 대한 결정을 미룬 채 금요일에 평소보다 두 시간쯤 일찍 퇴근을 했다.


난 평소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느껴지면 뭐든지 많이 먹는다. 먹는 것이 약이 된다고 나름대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입안은 소태같이 쓰고 입맛도 없지만 그저 이것저것 먹으며 내일 천안행 때문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일학년 장(長) 김치영 학우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님! 응원하러 내일 아침 8시에 출발합니다!"

이 전화를 받고 나는 도저히 천안에 못 가겠다고 대답할 용기가 없어 죽기 아니면 졸도 밖에 더하겠느냐고 생각하면서 가방을 챙겼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났다. 입안이 칼칼하고 쓰지만, 밥을 물에 말아 한 술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잘 다려진 양복을 입으려다가 창밖을 보니 물기 먹은 검은 구름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부을 것처럼 인상을 쓰고 있어, 양복을 포기하고 청바지를 입었다. 가장 간편한 복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다. 혹 실례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을 한 것은 대회 참가가 처음이기에 그랬다. 학교에 도착하니 우리가 타고 가야 할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으나, 함께 갈 일행들은 아직 보이지 않고 몇몇의 선배들만 있었다.

잠시 누워서 갈 생각으로, 버스 맨 뒤쪽에 자릴 잡고 앉아 오늘 오후에 있을 경연을 그려보고 있는데 '김치영 1학년장'과 '신경하 2학년장'이 버스에 와서 일일이 인사를 한다. 염치 불고하고 '신경하 선배'의 승용차에 편승을 부탁하고 일행과 별도로 먼저 출발한다.

학교를 벗어나 얼마 전에 원형대로 복원된 광화문을 뒤로하고 왼편의 역사의 흐름을 나타내는 광화문 광장을 벗어나 남산 터널을 통과하여 한남대교를 타고 일로 남으로 달린다.


고속도로 좌, 우의 숲이 지난밤 내린 비로 물기를 머금어 싱그럽기는 했으나, 성급한 녀석은 가을 옷 준비를 하는지 붉은 기운이 비추고 있기도 해서 가을이 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만사가 귀찮으니 주위의 경치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습관대로 메모를 하며 고속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승용차에 승차감을 느끼며 되도록 편한 자세로 반쯤은 누워간다.

주 5일 근무를 하는 탓에 쉬는 사람들이 조상의 산소에 벌초를 가는 차량으로 길이 많이 정체되고 있었다. 인터체인지에서 길을 묻고 동탄 신도시로 방향을 잡는다.

학생회 부회장을 픽업하여 가기로 사전에 연락이 되었단다. 부회장을 태운 차는 망설임 끝에 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로 접어든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날씬한 까치 한 마리가 길가 잣나무에 앉아서 물끄러미 쳐다본다. 길가에 뾰족 종탑을 가진 교회의 풍경이 정겨운 것은, 도심의 대형 교회들의 식상함 때문이다.


비는 멈췄다가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더니 이번엔 못 참겠는지 놋날 같이 퍼붓기 시작한다. 쏟아지는 빗속을 서다 가다를 거듭하던 차량이 천안을 못 미쳐 목천으로 접어들면서 비가 잦아들 무렵, 독립기념관 입구를 왼편으로 끼고돌자 먼저 가서 식사를 한 일행이 탄 버스를 만난다.

일행을 먼저 보내고 우리도 식사를 급하게 마친 뒤, 곧 뒤따라 국립중앙 청소년 수련원 정문을 통과할 무렵, 검은 하늘 한 복판이 동전만큼 뚫리고 파란 하늘이 윙크를 보낸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을 만큼 겪은 이 나이에, 청소년 수련장을 학생의 신분으로 들어가려니 조금은 쑥스럽고 민망하여 얼굴이 붉어지는데 뚫린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쏘아지듯  찬란하게 차 안으로 들어오면서 '이 사람아! 자네 지금 열일곱이야' 하며 속삭이는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내가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게 당신의 탓이라며 평생을 안타까워하시다 지난 2005년에 하늘의 부름을 받으신 어머니의 간절함이 환청으로 들렸나 보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하니 경향각지에서 모인 만학도들이 학교별로 속속 도착하여 그들만의 축제에 기대 반, 우려반으로 군데군데 모여 인솔 선생님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몸은 천근이었으나 내면에 잠재해 있던 투지와 용기가 꿈틀 됨을 느끼며 우리 학교 일행과 합류한다.

이제 잠시 후, 인원 점검과 숙소 배정이 끝나면 이들과 나름대로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겠지만, 누구도 근심하거나 긴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경연대회를 경쟁과 축제로 만들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입상을 하면 좋을 테지만 또 그렇지 못한들 어떠랴? 이 나이에 학생의 신분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으로 가벼운 흥분과 감격으로 전율한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 그것으로 오늘은 내 추억 속의 앨범에 아름답게 남아 있을 것이기에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진정하기가 쉽지 않은 순간이다.


미리 제출된 시화전에 출품 작품들이 족자 형으로 만들어져 만국기처럼 도열한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전국에서 글 솜씨를 뽐내는 학우들의 주옥같은 시어들을 감상하며 마냥 행복감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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