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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Dec 29. 2020

내 자리는 어디일까

아버지의 장례식. 선산에서 하관을 할 때 즈음엔 더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관 위로 한 삽 두 삽 흙을 퍼 뿌리면서는 그저 멍- 했다. 이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 하늘나라에서 돌아가신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걸까 생각하니, 바로 옆에 있는 어머니 묘소로 눈길이 갔다. 어머니의 묘 위쪽으로는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가 있었고, 어머니 옆자리는 20여 년 간 비어있다가 비로소(?) 채워졌다. 아, 부부는 나란히, 죽어서도 나란히 묻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니 더 새삼스러웠다. 


"와, 엄마 진짜 싫겠다."

내가 육성으로 내뱉자 옆에 있던 친척들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야, 반가울 수도 있지."

"그래. 20년 만에 남편 만난다고 마중 나왔을 수도 있어."

하는 대화들이 잠시 이어졌다.

그럴까. 살아있었을 때 일들은 모두 과거로 묻고 이제는 반갑게 아버지를 맞이 하는 게 가능한 걸까. 귀신이 되어서도 평생, 귀신이니까 어쩌면 '영원'일지도 모를 그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일이 즐거울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빠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며 악을 써댄 나는, 여전히 아버지 곁에 자리 잡고 있는 어머니의 묘소가 왠지 가여워 보였다.


이 세상을 떠나서도 머리 위로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모시고 남편까지 맞이한 어머니는 어떤 기분일까. 이런 상상조차 살아있는 자들의 쓸데없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괜히 어머니의 기분이 궁금했다. 마중을 나오실 만큼 반가우실까. 정말 '저 세상'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버지를 만나는 어머니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렇게 술 퍼마시더니 이 꼴이 뭐요" 구박을 하실까,  "고생했소"하며 품어 주실까. 상상은 상상일 뿐, 정답은 정말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두 분의 묘소를 바라보며 새삼 내 자리가 궁금해졌다. 죽어서 무덤 하나 갖고픈 그런 열망은 없었지만, 문득 내가 묻힌다면 내 무덤을 마련한다면 어느 땅에 자리를 잡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 집'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딸인 나의 자리는 없는 선산.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여기에 다 계시지만, 내 자리는 없는 이곳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오빠와 그의 부인이 될 사람(누구인지는 아직 모르지만)의 자리는 있겠지만, 내 자리는 애초부터 없었다. 

애초부터 내 자리가 없던 이 곳을 떠나, '저 집'으로 시집을 갔던 나. '죽어서도 저 집 귀신이 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실감나게 와 닿는다. 역시, 옛말은 곱씹을수록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저 집 귀신이라는 말은, 무덤마저 저 집에 마련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참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어쩌나. 저 집 귀신도 되기 싫다며 이혼 소송을 시작해 버렸는데. '이 집'에도 내 자리는 없고, '저 집'에도 속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나는, 어느 집 소속 귀신이 되어야 하는지 문득 궁금했다. 


선산에 자리잡은 어머니 묘소를 보니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그저 막연히 하늘나라가 있다면, 나도 죽으면 어머니를 만나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죽어서도 가까이 있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이 집 귀신, 나는 소속이 없는 귀신. 부모 곁에 마음대로 자리조차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딸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만들어지지 않는 내 자리.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모든 소속이 사라지고 난 이 시점에 다시 보니, 모든 것이 참 생경하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제사에 '열심'이셨다. 아버지의 전체 삶을 통틀어 일관되게 최선을 다한 한 가지를 꼽으라면 제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모든 일정이 제사를 중심으로 흘렀다. 장남의 업보라고 누군가는 무거워 할 짐을, 아버지는 기꺼이 짊어지셨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장남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그 순간을 즐기시는 듯 보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제사 사랑에 닥친 첫 번째 위기는 어머니의 암이었다. 암 선고 당시부터 워낙 위중한 상태였기에, 제사 음식을 마련하라고 할 수도 없는 일. 아픈 어머니를 두고 제사 음식을 걱정하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친척들 도움으로 몇 차례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고모가 전을 구워 오고, 숙모가 국을 끓여와 상에 올리는 식이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 사시는 분들이 제사 때마다 매번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사 음식을 만들어야 할 '여자'의 빈 자리는, 장남인 아버지 혼자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었다. 오빠와 삼촌들, 친척들 모두가 제사 대신 다른 방법으로도 조상을 섬길 수 있다고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아버지는 꼿꼿하셨다. "내 대(代)에서 제사가 끊기면, 조상님 뵐 면목이 없어서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 아버지의 주장이었다. 아버지를 설득하기를 포기한 우리들은 "알아서 하시라"며 아버지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알아서 하시되, 우리는 돕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이다. 


아버지가 고심 끝에 마련한 방법은 제사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집에서 직접 만든 음식과는 질적으로 비교하기도 어려웠지만, 아버지는 배송 받은 그 음식을 제기에 옮겨 상에 차려냈다. 다른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음식이라도 구색 맞춰 '차리기'만 하는 것이, 정말 조상님이 원하시는 것이 맞는지 점점 더 알 수 없어졌다. 내가 조상님이라면 모든 후대가 편안하게 살기를 바랄 것 같은데, 아직 어려서 이해가 안되나 보다 하며 아버지를 지켜봤다. 아버지는 어쨌든 꿋꿋이, 조상님을 위해서인지 본인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인지, 혹은 둘 모두를 위해서인지 정말로 꿋꿋이 제사를 이어가셨다.


그리고 두 번째 위기가 닥쳤다. 아버지 본인이 쓰러지신 것이다. 극심한 섬망의 시기가 지나가고 날짜를 가늠하실 수 있게 된 무렵부터 아버지는 누워서 제사를 걱정하셨다. 혼자 거동도 힘드신 분이 본인 몸만 생각하지 않고, 이미 세상을 떠난 조상님 제사를 걱정하는 것 또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제삿날이 되면 종교적 방식으로 우리 나름의 예는 지키고 있다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셨다. 하지만 그 시기도 곧 지나갔다. 입원이 길어지면서 점차 쇄약해지신 아버지는 날짜 감각이 흐릿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더이상 제사 걱정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멍-하니 TV만 바라보는 날들이 이어졌다. 






'출가외인'이 되어 남이나 마찬가지인 내가, 선산에 묏자리도 하나 없는 내가 신경쓸 일은 아니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조상님 뵐 면목이 없다던 아버지는 조상님들을 만나셨을까. 그 조상님들은 아버지를 '제사 끊은 놈'이라 욕하시려나.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 때문에 계속 면목 없어 하고 계시려나. 본인 제사상을 우리가 차려주길 바라시려나. 의문은 계속 떠올랐지만, 답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제사 끊은 놈의 딸인 나는, 내년 아버지의 첫 기일이 오면 선산에나 한 번 가야겠다 생각했다. 전이나 나물같은 제사 음식 말고, 아버지 좋아하시던 소주나 한 병 사 들고 카레나 만들어서 가야겠다 생각했다. "원하시는 수준의 예절을 갖추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고 인사도 해야지. 그리고 "제사는 안 지내지만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안되는 건가요" 하고 말씀이나 한 번 드려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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