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은 Dec 18. 2021

어떤 한 사내

창작시

오늘처럼

눈이 내리면

인적 드문 공원

어느 벤치가 생각 나

그 옆에 떨고 있던 회양목,

안쓰럽게 바라보던 낡은 가로등,

쓸쓸한 담벼락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없이 흐느끼는 담쟁이덩굴,

같던

어떤 한 사내


그는

얼어버린 벤치에 앉아

내리는 눈 맞으며

혈관 속을 따라 흐르는

붉은 꽃씨를 보고 있었어

쿨럭,

하얀 눈밭에

새빨간 꽃들이 피어오르고

소나무 가지 위 까마귀는

범죄의 현장 인양

숨 죽여 지켜봤어

번쩍거리는 눈빛만

적막한 밤을 비추었지


잠시 후

그는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해

생애 내내 저축한 

고독을 짊어지고

눈 내리는 공원을

홀로 걸어가

눈 쌓인 벤치도

그 옆에 떨고 있던 회양목도

그를 비추던 낡은 가로등도

담벼락에 얼굴을 부비던 담쟁이덩굴도

그런 그의 뒷모습에

가만 울더라

나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엔

어쩐지 그 사내가 생각나

왼쪽 가슴

붉디붉은 배롱꽃을 키워

흰 눈 위에

꽃씨를 흩날리던,

계절을 잘못 고 피어난 여린 

다시 겨울눈 되지 못해

가녀린 의지가

발자국으로 남았던

 사내가






얼마 전 직장 동료가 결핵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평소 낙천적이고 성격 좋던 그 동료의 얼굴에 설핏 보이던 노오란 그림자가 사실은 폐 속에 자신도 모르게 키우고 있던 결핵의 빚깔이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선진국에서는 사라진 줄 알았던 결핵이 여전히 발병한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지요. 한동안 결핵은 제게 실체이자 실존이었습니다. 다행히 동료는 몇 달 후 건강해진 모습으로 복귀하였지만요. 

결핵이, 결핵이라는 고통이,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은 저는 이렇게 시로써 한풀이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눈 내리는 밤의 쓸쓸한 이미지 같은 결핵 환자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서사로써 추운 세상을 조금 더 견뎌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겨울이 되니, 따듯한 모닥불 같은 글을 찾아 브런치를 더 기웃거리게 됩니다. 눈 속에서도 싹을 틔워내는 사프란을 생각하며 추운 계절을 어떻게든 견뎌내야겠다는... 가녀린 의지를 딱 촛불만큼만 밝혀 봅니다.



이전 14화 몰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