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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Dec 20. 2018

기차 맞은편에 앉은 한 남자

세 시간은 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창문에 머리를 박고 수면 모드로 돌입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바로 앞자리에 누가 봐도 훤칠한 훈남이 앉아 있다. 세 시간 동안 그와 마주 보고 갈 생각을 하니 신경이 쓰인다. 난데없이 심장이 두근거린다.   




  

벌써 몇 번째였다. 부산에 발령받아 매주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딸에게 엄마는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집요하게 물었다. 어느덧 아홉 달째 부산행이었다. 주중에는 부산에 있는 사택에서 지내고 주말에는 가족이 있는 서울로 향했다.

“제발 연애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날도 엄마의 계속되는 추궁에 나는 당장 결혼정보회사라도 가입하겠다고 울며 겨자 먹기 식의 대답을 했다. 그러고는 차에서 내려 기차 역사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오른손에는 전날 엄마를 도와 담근 김치 한 통이 들려 있었다.



일요일 저녁,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차 역사 안은 마치 유령도시처럼 모든 것이 멈춰 있는 듯했다. 아득히 느껴질 만큼 거대한 천장 안을 감싸고 있는 차가운 공기와 새로 지은 건물에서 뿜어져나오는 독특한 화학약품 냄새가 나를 에워쌌다. 서울에서 주말을 보내고 홀로 부산으로 향할 때면 평소에는 자주 보지 못했던 외로움이란 녀석과 마주하고 만다. 외로움은 언제나 불현듯 찾아와 고요했던 가슴을 휘저어놓는다. 부산에 연고도 없는 서울 처녀에게 일요일 밤 기차는 그래서 더욱 쓸쓸했다. 기차 안에 들어서니 오른손에 들린 김치통이 마음에 걸린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세 시간 동안 좁은 기차 안에 김치통을 두자니 김치 쉰내가 벌써부터 폴폴 새어나올 것만 같다. 혼자 앉는 좌석이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텐데 하필 동반석(현재의 가족석)이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로 자리에 들어섰다. 오늘도 어김없이 창문에 머리를 박고 수면 모드로 돌입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바로 앞자리에 누가 봐도 훤칠한 훈남이 앉아 있다. 세 시간 동안 그와 마주 보고 갈 생각을 하니 신경이 쓰인다. 난데없이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며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가 눈을 감는다. 나는 이때다 싶어 노골적으로 그의 얼굴을 관찰해본다. 쌍꺼풀이 짙진 않지만 부리부리한 눈, 굵고 시원시원한 눈썹, 오똑한 코와 적당히 두꺼운 입술 그리고 넓은 어깨와 훤칠한 키까지 단번에 가늠된다. 그는 누가 봐도 호감 가는 사람이었다.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나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너무 호감형인 남자는 괜히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었고 평범한 외모의 나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갑자기 그가 눈을 뜬다. 계산되지 않은 뜻밖의 눈 맞춤에 깜짝 놀라 창밖을 쳐다보며 심장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곧 창문으로 반사된 그의 얼굴을 다시 훔쳐보고야 만다.      

왜 이러지. 이 남자, 자꾸만 보고 싶다.  

대각선에는 오십대 아주머니가, 옆자리에는 중년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갑자기 아주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에게도, 옆자리 아저씨에게도, 훈남에게도, 자신을 화가라고 소개하며 서울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하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현역 공군 장교였다. 군에서 비행을 했다는 그는 직업만큼이나 진중한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그의 진지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그동안 알아온 동갑내기의 대학 동기나 한두 살 위의 회사 동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에게 빠져들었다.

“서울이 고향이고 부산에 온 지는 1년이 안 되었어요. 그런데 아직 부산 구경을 제대로 못 해보았네요.”

그와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서울이 고향이고 잠시 부산에서 근무하고 있는 점, 그리고 주말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처지가 사뭇 비슷했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솔로였다.      



그는 외모만큼이나 목소리도 매력적이었다. 고3 야자시간, 선생님 눈을 피해 이어폰을 긴 머리카락으로 가린 뒤 별밤 라디오를 듣곤 했는데 그의 목소리가 꼭 심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법한 그런 목소리였다. 졸리지 않은 사람도 졸리게 만들 것만 같은 꿀이 떨어지는 중저음의 목소리! 이대로 밤새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미 나의 시야에는 그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를 더 알아가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욕심일 뿐이었다. 단 세 시간 만난 상대에게 그 누가 마음을 열겠는가. 그 누가 연락할 용기를 갖겠는가.      



기차는 어느덧 부산역의 전 전거장인 구포역에 다다랐다. 당시 나는 구포역에서 사택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있었기 때문에 구포역에서 내려야 했다.

그는 부산역에서 내리겠지? 오늘은 부산역에서 내려서 그에게 말을 더 걸어볼까? 아냐, 구차해 보여. 나에게 관심도 없을 거야.’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 복잡 미묘한 감정이 오갔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갈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저는 여기서 내려요. 오늘 즐거웠어요. 안녕히 계세요.”

커다란 김치통을 한 손에 들고 기차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용기가 없는 내 자신을 자책하며 한숨을 푹 내쉰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가 김치통을 손에서 빼앗았다. 그였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괜찮아요. 제가 들 수 있어요.”

두 번을 거절하자 그는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 화가 아주머니한테 혼나요. 버스 정류장까지 들어드릴게요.”     



그와 나란히 걷는 내내 심장이 요동쳤다. 그 소리가 들릴까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 내내 너무 떨려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정류장에 도착하자 잠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은 그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내 옆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꿈이 현실인 듯, 현실이 꿈인 듯한 순간이었다.



집에 도착했다. 그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우리 앞으로 종종 만나도 될까요?’     

그렇게 그와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앞이 보이지 않던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좁은 골목길에서 운명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세 시간은 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에 너무나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인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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