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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Jan 17. 2019

33주 0일 아침, 구급차를 타다

“엄마의 자궁 안에서의 하루는 인큐베이터에서의 1주일과도 같아요.”

냉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내다 퉁퉁 부은 손가락 때문에 그만 놓치고 말았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엄지발가락과 정강이에서 피가 흘러내려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아악!!’





임신 33주 0일, 어느덧 나는 그토록 소망하던 33주라는 꿈의 문턱에 올라가 있었다. 이제 이틀 후면 출산 전 마지막 진료를 받게 될 것이고 그날이면 세쌍둥이 출산일이 최종적으로 결정될 것이었다. 그동안 별 일 없이 자라준 뱃속 꼬물이들에게 그저 고마웠고 모든 것이 바람대로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이틀만 더 견디면 우리 아가들 엄마 만나는 거야!’      


33주를 갓 넘은 그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33주가 되었다는 큰 기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호랑이 기운이 마구마구 샘솟는 기분, 불끈불끈 과잉된 에너지. 나는 그저 움직이고 싶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큰애 유치원 가방과 옷을 챙기고, 출산 가방을 풀었다 다시 싸고, 얼마 쌓이지도 않은 빨래를 돌리고, 마른 빨래를 차곡차곡 접어놓고, 냉장고 정리를 하고 연이어 아침밥을 차렸다. 꼭두새벽부터 시작된 이 쓸데없는 가사노동은 출산을 코앞에 둔 엄마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동 양식이었다. 큰애 때도 그랬다. 출산 바로 전날까지 쓸데없이 쓸고 닦고 정리하고 설거지하고 또 치우고. 하지만 임신 후 33주가 되기까지 나는 그 욕구를 꾹 참아왔다. 33주 0일 아침, 나의 그 욕구는 마침내 봉인 해제되어 세상으로 분출되었다. 나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망각한 채로.


밥상을 차리기 위해 냉장고에서 반찬을 하나둘 꺼내고 있었다. 마지막 김치통을 꺼내던 바로 그 순간, 퉁퉁 부어 제대로 구부러지지도 않던 손가락은 결국 유리 김치통을 놓치고야 말았다. 당시 붓기는, 손으로 피부를 눌렀을 때 움푹 패어 다시 평평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정도로 심각했다.     


‘쨍그랑!’


김치통이 깨져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동시에 커다란 유리 조각이 엄지발가락을 파고들었다. 찢어진 발가락에서 순식간에 피가 솟구쳤다. 왼쪽 정강이도 유리 파편에 맞아 피가 흘러내렸다. 쏟아진 김치 국물과 흘러내린 피가 부엌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아악!”


비명 소리를 듣고 남편이 달려나왔다. 큰애도 걱정된 눈빛으로 방문 밖을 쳐다보았다.     


“하아, 많이 찢어졌잖아. 119죠? 빨리 와주세요. 저희 집 주소는….”


남편은 서둘러 119를 불렀다. 그때까지도 발가락이 찢어졌는지도 몰랐던 나는 대충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제야 모든 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물밀듯이 엄습했다. 긴장감에 커다란 배가 딱딱하게 뭉쳐왔다. 10분 후 119 소방대원이 집에 도착했다. 그들은 재빨리 상처 부위를 생리식염수로 소독을 하고 붕대를 감아 지혈을 했다. 그러고는 나의 육중한 몸뚱이를 들것에 실었다. 그렇게 나는 핑크색 파자마를 입은 채 소복한 다리털을 밀지 않은 야생의 모습 그대로 앰뷸런스로 이송되었다.     


“유리 조각이 엄지발가락 위의 살을 회를 뜨듯이 브이(V) 자 모양으로 찢어놓았네요. 찢어진 피부가 너무 얇아서 제대로 붙을지 모르겠어요. 봉합된 피부가 괴사하게 되면 피부 이식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내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들. 현기증이 아찔하게 머리 주변을 맴돌았다. 그렇게 여섯 바늘을 꿰매고 발에 붕대를 감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긴장이 풀렸는지, 아니면 슬슬 마취가 풀렸는지 아릿한 통증이 그제야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틀 뒤, 마지막 진료를 위해 S병원으로 향했다. 임신 33주 2일, 예기치 않게 부상을 입었지만 이제 곧 아기들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엄마, 너무 좋네요. 아기들도 내려오지 않았고 경부 길이도 적당하고 이거 더 버틸 수 있겠는데? 우리 조금만 더 버텨봅시다. 딱 2주만 더.”


J교수의 말은 청천벽력 그 자체였다. 퉁퉁 부은 몸에 발에 감은 붕대까지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인 내게 2주를 더 버티라는 것은 가혹한 제의였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열흘 후 미국으로 출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세쌍둥이 출산을 함께 하기 위해 일부러 뒤로 잡은 스케줄이었다. 세쌍둥이의 최대 만삭이라는 마의 35주까지 견딜 것이라는 상상을 결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세쌍둥이의 최대 만삭은 35주로 이보다 더 지나게 되면 일반 여성의 자궁은 아이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


“휴우, 이게 무슨 얄궂은 운명이람. 세쌍둥이 출산, 남편 없이 과연 혼자 해낼 수 있을까?”     


신생아 집중 치료실 옆 출입구로 마스크를 쓰고 나오는 한 산모의 얼굴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두 눈이 퉁퉁 부어 있던 그녀는 연신 아기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임신 30주차도 안 되어 조산을 했기 때문에 1킬로그램대의 아주 작은 미숙아로 태어난 그녀의 아기들은 모두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 있다고 했다. 산후조리원에 아기도 없이 덩그러니 혼자 누워 있는 현실이 너무나도 슬퍼서 그녀는 매일같이 모유를 배달하러 병원에 들러 아기들을 만난다고 했다. 그녀는 인큐베이터 속 아기들을 보며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엄마가 하루라도 더 품어주지 못해 미안해.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모유를 배달해주는 것밖에 없구나.”     

세쌍둥이 엄마들의 커뮤니티에는 비슷한 사연의 글들이 자주 올라왔다. 만삭인 35주를 겨우 채운다고 하더라도 신생아실로 바로 옮겨지려면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하기 때문에 아기가 니큐나 인큐베이터에 머물지 않고 신생아실로 옮겨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더구나 세 아기가 한꺼번에 신생아실로 직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들의 바람은 하루라도 더 뱃속에서 품어서 남들처럼 아기와 함께 산후조리원으로 가는 것이었다. 평범한 임산부에게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세쌍둥이 임산부에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 전, 한 세쌍둥이 엄마가 임신 25주차에 조산을 하여 한 명의 아기를 출산하고 자궁 경부를 봉합한 채 두 달을 버텨 나머지 두 명의 아기를 출산한 사례가 뉴스에 소개되기도 했다. 자궁 경부를 봉합하고 두 달 가까운 시간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산모는 자궁 수축 억제제를 매일같이 투여받으며 찢어질 듯한 고통을 이겨냈다고 한다. 단 하루만이라도 더. 그녀의 바람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엄마의 자궁 안에서의 하루는 인큐베이터에서의 1주일과도 같아요.”


J교수를 처음 만났던 날, 그가 내게 해주었던 이 한마디는 나를 지배하는 모든 잡념을 붙잡고 있었다. 임신 33주차는 세쌍둥이 임산부에게 이미 충분히 오래 견딘 기간이었지만, 그래서 당장 내일이라도 남편과 함께 분만장에서 아기들을 맞이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솟아올랐지만, 고민을 하는 내내 병원에서 보았던 한 엄마의 눈물을 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부러운 고민에 빠진 행운아였다. 만삭인 35주까지 버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만으로 이미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행운아인 것이었다. 큰애를 출산하던 날을 떠올렸다. 출산은 엄마와 아기가 함께 하는 여정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엄마 자궁에서 나올 준비가 되지 않은 아기들에게, 하루라도 더 엄마 자궁에서 클 수 있는 아기들에게 그런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겁먹지 말자.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자. 남편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치 않아. 나는 혼자가 아니야. 아기들과 함께 있잖아.”     


왼쪽 엄지발가락에 또다시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갑작스럽게 새겨진 왼쪽 엄지발가락의 브이자 모양의 상처가 앞으로의 장밋빛 미래를 예견하는 승리의 브이처럼 보였다.


마치 내 운명에 새겨진 주홍글씨처럼.











유일한 세쌍둥이 만삭 사진. 당시 불어난 체중 때문에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 되돌아보니 후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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