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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별 Sep 20. 2024

하동빈│저주인 걸까


소년

하동빈

────



콰쾅!

와장창!!


무거운 다리를 어거지로 끌고서 결국은 또 도착했다. 학교가 끝나지 않기를, 시간이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지만 오늘도 이뤄지지 않았다.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그리고 단군왕검까지 내가 아는 모든 신들을 소환해 보았지만 응답은 없었다. 세상에 신이 있다고? 그건 개소리다. 신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로 나를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을 테니 말이다. 


"할미가 알아서 할텐게, 큰 소리 나면 절대 들어오지 말어. 알겄지?"


나직하게 속삭이던 할머니의 음성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대문을 넘으려 한 발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제자리로 내려버렸다. 두려움은 절대로 내가 밟고 일어설 수 없는 어마무시한 상대였기에, 대문 옆으로 두 발자국을 옮겨 담벼락 아래 엉덩이를 붙이고 쪼그려 앉았다. 가슴 가까이 무릎을 바짝 당기고서 말이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꾹 누르고 나면 조금은 진정이 될까 싶었다. 뒤이어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보지만 큰 수확이 없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소리의 양이 제법 많은 탓이었을까, 아니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머릿속에 어지간히 선명하게 그려진 탓이었을까.


얼마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온갖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만들어낸 투박한 소음도, 자동차 경적만큼이나 커다랗던 고함 소리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적막의 평화가 찾아왔다. 짧은 정적,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현관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에 그려있던 나는 곧게 펴지고야 만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묵직하고도 익숙한 소리와 퀴퀴한 알코올 냄새의 주인공은 아버지였다. 대문을 지나며 웅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미간좁히며 말을 걸어왔다.


"뭐 하냐? 들어가서 치워."


아버지를 보고서 인사도 안 하냐는 푸념의 공격을 받고 싶지는 않았기에, 벌떡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했다. 골목길을 따라 앞으로 저벅이며 나아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욕이라도 한 발 시원하게 날려주고 싶었지만, 생각과는 다른 공손한 대답이 튀어나온다.


"네."


긴 다리 덕인지 그는 빠르게 사라져 버렸고, 추악한 뒷모습을 더는 보지 않아도 되었음에 다행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적어도 오늘, 나만큼은 멀쩡할 수 있었음에 대한 안도일지도 모르겠다.


"윽!"


젠장! 갑작스럽게 고통이 찾아왔다. 오른쪽 다리가 싸하게 아려왔다. 쥐가 풀리거든 들어갈까 싶다가도 그건 아니다 싶어 고통을 참아보기로 했다. 발목이 부러지고 피가 철철 나던 그날을 떠올린다면 이 정도 아픔은 주사 바늘을 꽂았을 때의 따끔한 느낌 정도라고 해두는 게 좋겠다. 옅은 신음 소리가 목구멍 안에서 빙빙 돈다.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지를 알 수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듯 말이다. 다리를 절뚝이며 힘겹게 대문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할머니!"


혹시나가 역시나로 바뀌는 시간은 0.1초면 충분했다. 잡다하게 널브러진 온갖 잡동사니들 사이 할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자주 보는 광경이었지만 난 여전히 익숙해질 수가 없다.


"할머니! 괜찮아?"


뒤꿈치를 이용해 손도 대지 않고 운동화를 대강 벗어던지고는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섯 발자국도 되지 않는 부엌까지의 거리가 어찌나 멀게만 느껴지는지. 독수리쯤으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고 찰나의 순간 생각해 본다.


"...... 우리 동빈이 온겨?"


할머니의 희생 덕에 오늘도 내 목숨은 온전히 붙어있을 수 있었다. 그런 할머니가 혹여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어쩌지 싶어 순간 심장이 멈춰버렸다. 할머니 입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다행이라고 느낄 새도 없이 할머니가 괜찮은지 온몸 곳곳을 살펴보아야 했다. 왼쪽 무릎에서는 새빨간 피가 적잖이 흐르고 있었고, 양 손목에 빙 둘러진 까만 멍자국은 존재감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다리에 쥐 좀 났다고 아픔을 참았다며 잠시나마 뿌듯해하던 나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졌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할머니의 작고 거친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것이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리고 지금 역시도 나는 할머니를 지켜내지 못했다. 가벼운 태풍마저도 집어삼켜버릴 것만 같은 여리고 가냘픈 할머니가 또 한 번 나를 보호했다는 사실에 오늘도 내 영혼은 저 깊은 땅 속으로 처박히고야 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넌 절대 헤어 나오지 못할 거야.'라며 누군가 나에게 저주를 퍼부것은 아닐까.


"우리 강아지, 울지 말어. 할미 괜찮어."

"피가 이렇게 나는데... 할머닌 괜찮다는 말이 나와?"

"할미가 미안허다. 미안혀..."


어떤 바람도, 희망찬 내일도 꿈꿔본 적 없다. 저주에 걸린 난 그 어떤 것도 품어서는 안됐으니까. 누군가를 또 불행하게 만들고야 말테니까.




*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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