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달 사이 1
서울과 달 사이를 시월의 밤이 빽빽이 메운 채 깊어가고 있었다. 아예 눈을 감아버릴 듯이 가늘어진 그믐달은 자신이 무얼 어쩌겠느냐는 듯이, 밤에게 뒤덮여 가는 도시를 그저 실눈을 뜨고 방관했다. 걷잡을 새도 없이 갑자기 짙어진 농도의 어둠 속에서 시간은 힘겹게 허우적대고 있었다. 갓 새벽의 서울시는 언제나처럼 네온사인을 열심히 지피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부쩍 차가워진 가을 공기에 이 도시의 밤은 어제들의 밤보다 너무나 무기력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본디 도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스스로를 내던지고 불사르며 돌아가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은 것이다. 특히 서울은 그중에서도 절대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로 유명하지만, 지금만큼은 가로등에 밝혀진 전등의 미세한 진동마저도 공기 중에 들릴 듯이 고요한 밤이었다. 도시는 마치 동력을 잃고 멈춰버린 듯했다.
창백해진 지상의 피부 아래에는 도시의 이곳저곳을 혈관처럼 연결하는 지하의 터널들이 있다. 그리고 그중 <2호선>이라 불리는 길 하나를 그날의 마지막 지하철이 자신 앞의 어둠을 확인하며 달리고 있었다. 열차는 덜컹덜컹 교대역을 지나 강남역을 향하고 있었고, 주원은 그것의 <4-4> 칸에 타고 있었다. 흔들리는 열차 속 좌석 위에 일렬로 나란히 매달린 손잡이들은 작당 모의라도 한 듯 다 같이 숨을 죽인 채 스르륵 잠이 든 주원을 주시하며 넘실넘실 파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고 있는 그를 깨우지 않은 채 기어이 끝까지 데려갈 셈이었다. 종착역의 안내원에게 깨워져 비로소 일어났을 때 짓게 될 그의 난처한 얼굴을 꼭 봐야겠다는 짓궂은 심산이었다.
주원은 꿈을 꾸고 있었다. 오랜만에 꾸는, 하지만 이미 여러 번 꿔본 꿈이었다. 대게의 꿈과 마찬가지로, 이 꿈 역시 시작점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일까.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던가? 꿈속의 주원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정신을 차리게 되고, 이내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런 중력이 느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주원은 마치 망망대해 위 조각배처럼 우주에 떠 있는 것이다. 저 멀리 가늠도 되지 않는 거리에 별빛이 띄엄띄엄 시야에 들어온다. 주원은 손발이 너무나 차가워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모아 비비려 했지만, 곧 그에겐 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손이 없다기보다, 그에겐 아예 몸이랄 것이 없다. 그러니 손발이 차갑게 느껴진다는 것은 완벽한 착각이다. 몸이 없으니, 당연히 고개를 돌릴 수도 없다. 목이라는 것이 없으니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목이 있는 마냥 자신의 위와 아래, 양옆을 볼 수 있는 것은 왜일까. 몸이 없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와 양옆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 또한 그저 자신의 몸의 부재일 뿐이다. 그 꿈속에서 그는 마치 형태가 없는 의식 그 자체, 혹은 영혼 같은 존재였다. 숨을 쉬는 행위는 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다만 숨을 쉬는 행위가 필요하지 않은 어떠한 상태였을 뿐.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것은 그다지 이상하거나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주원은 칠흑같이 어두운 그 공간에서 허우적댔다. 「공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공간이라기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위아래가 정해져 있지 않은 깊고 무한한 어둠 속에서 주원은 「온몸」으로 발버둥 쳤다. 발이 어딘가를 딛고 서있지 않은 채로 무한한 공간의 가운데에서 느끼는 처절한 무기력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종류의 좌절감과 공포감이었다. 광활한 암흑에 갇힌 「의식」이 느끼는 공포감은 꼼짝달싹할 수 없는 채로 코에 천장이 닿을 듯이 비좁은 관짝에 갇혀버린 산 사람의 그것과 다르지 않거나 더 할 것이다.
여기까지의 인식은 그 순서까지도 이 꿈을 꿀 때마다 신기하리만치 똑같았다. 매번 이 과정을 순서대로 겪었고, 그 사실 또한 인식하게 되는 순간, 주원은 과거로부터 이 꿈의 마지막을 기억해 낸다. 고개가 없음에도 고개를 비틀 수 있는 그는 문득 자신의 오른쪽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기억해 낸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오른쪽을 보지 않으려 무의식적으로 몸서리치고 발버둥 친다. 그럼에도 그의 의식은 서서히 오른쪽으로 빙 돌아가게 되고 결국 그것을 마주하게 된다. 중력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리 미세한 추세라도 그것은 곧 흐름이 되어 쉬이 거스를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는 주변 시야 옆으로 점점 보이게 되고 있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눈이 없어도 마치 눈이 있는 것처럼 그것이 보인다. 그리고 눈이 없어서 눈을 감을 수도 없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목격하지 않으려 한 것은 바로 목성이었다. 그때 주원이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목성 공포증>이리라. 목성 공포증이란 인간이 자신의 일상적인, 평소의 범주를 벗어난 목성같이 초월적이고 압도적인 크기의 존재를 눈앞에서 봤을 때 느끼게 되는 두려움인데, 이 경우엔 그 존재가 다름 아닌 목성 그 자체인 경우였다. 지구 부피의 약 1300배 정도라고 알려진 그것은 쉬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다. 기체로 이루어진 구름들이 수천, 수만 마리의 거대한 지네들처럼 불규칙적으로 서로 얽히고설키며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고, 그 사이엔 거대한 홍색 타원형의 반점 하나가 자리를 잡고 영원히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 모든 것은 주원에게 너무나 무섭고 끔찍한 광경이다.
주원은 겁에 질려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머리로 한 선택이 아닌 순수한 반응이다. 그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은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어둠이 집어삼킨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그 어둠은 무서울 만큼 고요했고 무거웠다. 가슴속의 무언가가 마치 납덩이에 묶인 채로 끝도 모를 심해의 바닥으로 영영 추락하고 있는 듯한 절망감이다.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꿈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렇게 소리 없는 비명을 몇 번 지르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쯤이 그 꿈의 처음부터 정해진 완료 시간인 것인지, 혹은 그가 비명을 몇 번 지르는 것이 비로소 그 꿈에게서 해방이 되는 일종의 주문인 것인지 그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 꿈속에서 주원이 매번 느껴야 하는 공포와 절망감은 어떤 식으로도 회피할 수 없는 종류였다. 마치 몇 번이고 바퀴벌레를 목격하게 된다 하여도 그 순간에는 화들짝 놀라는 것 외에는 딱히 별다른 생각도 행동도 취할 수 없는 것처럼.
목덜미에 식은땀이 살짝 난 채로 꿈에서 깨자마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차내 안내 스크린을 확인했다. 렌즈를 낀 채로 잠에 든 탓에 주원의 눈이 뻑뻑하여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어폰을 빼고 잠시 기다리자 다행히 차분하고 상냥한 목소리의 안내방송이 주원에게 다음이 <선릉역>이라 알려주었다. 열차 안 전등이 잠시 깜빡였다. 운이 좋게도 다음 역에서 내리면 되는 주원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막차인데 큰일 날 뻔했군.’
열심히 몸을 들썩이며 단체로 주원을 향해 고약한 주문을 외던 지하철의 손잡이들은 그가 깨어나자 풀이 죽은 듯이 얌전해졌다. 주원은 잘 뜨이지 않는 뻑뻑한 눈을 꾹 감고 양 손바닥으로 과격하게 비볐다. 때마침 나온 하품에 눈이 조금이나마 촉촉해지며 그의 시야가 조금씩 회복되었다. 자는 내내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던 핸드폰을 보니 12시 7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침 이어폰에서 나오고 있는 노래는 윤상의 <악몽>이었다. 주원은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월요일부터 밤이 늦기까지의 외출이라니, 집돌이인 주원답지 않은 일이었지만 친구 민재에게 불려 나갔던 것이다. 숙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기서 소주 한 병을 더 시키는 게 아녔어......’라고 후회를 하며 비로소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자, 지하철 안엔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열차가 몇 번에 걸쳐 브레이크를 단계적으로 밟았고, 바퀴와 철로의 카랑카랑한 쇠 마찰음이 끼익 하는 브레이크의 단호한 소리와 함께 멎자 열차 칸의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끌어안고 있던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내리려는 주원의 눈에 <역삼역>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들어왔다.
‘어… 뭐지?’ 잠시 어리둥절했던 주원은 벽에 쓰인 역삼역을 눈으로 다시금 확인한 뒤 지하철 칸으로 되돌아왔다. 주원은 분명 이번이 선릉역이라고 들었다고 생각했다. ‘술이 덜 깼나......’ 그는 그저 빨리 집에 들어가 그의 좁지만 아늑한 오피스텔 침대에 쓰러져 잠들고 싶었다. 스크린도어가 닫히고 지하철이 속도를 서서히 올리며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주원은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꽈악 쥐어 잡고 자신의 무게를 그것에 온전히 매달았다. 지하철의 손잡이라는 것은 새삼 참 튼튼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단 1그램의 의심 없이 자신의 7,500 그램 모두를 다 맡길 수 있다. 그것이 절대 갑자기 끊어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세상엔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것들이 그리 흔치 않다.
‘그런데 왜 역삼역에서 아무도 타지 않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왜 내리는 사람도 하나 없는 것인가. 아니지, '왜 지금 이 지하철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것인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뒷칸을 봐도, 왼쪽으로 돌려 앞 칸을 봐도 이 열차 안은 역시나 텅텅 비어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문래역에서 그가 탔을 땐 분명 탑승객들이 꽤 많이 있었다. 가까스로 자리에 앉을 수는 있었지만. '그새 다들 어디서 내려버린 걸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랄 것까진 아니었지만 참 이상한 일이긴 했다. 역삼역을 지나는 막차는 언제나 승객들이 붐볐다. 게다가 막차가 아닌가. 주원같이 술이 거하게 들어간 사람들이 발개진 얼굴을 하고선 비틀비틀 탑승하는 게 보통이었다. 어쩌면 이 열차는 이미 운행을 종료하여 차고로 퇴근하고 있는 것일까. 마치 뇌세포들이 알코올 속을 헤엄치는듯한 불쾌한 지끈거림을 느끼며 주원은 입을 꾹 다문 채 일단 다음 역을 기다렸다. 방금 꿨던 그 낯설지 않은 꿈이 문득 떠올랐다. 매번 기분 나쁜 꿈이었다. 그 꿈속에서 그는 ‘아, 또 이 꿈이구나’ 라기보단 ‘또 이곳에 갇혔구나’라는 절망을 느꼈다. 인간은 좁은 곳에 갇힌 갑갑함보다는 끝을 모를 정도로 넓은 곳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때의 외로움과 막막함이 더 힘든 것일까. 계속되는 약간의 메스꺼움을 느끼는 중 안내방송이 다시 나왔다.
“이번 역은 선릉, 선릉역입니다. 다음 역은 삼성역입니다. 내리시는 문은 오른쪽입니다.”
주원은 안도하며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다시 오른쪽 어깨 위에 끌어올렸다. 운행을 종료한 지하철에서 안내방송이 나올 리 없다. ‘자, 어서 집에 가자.’
지하철 전등이 잠시 깜빡였다. 지하철은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다시 단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긴 끼이익 소리와 함께 정차했다. 문이 열렸다. 깊어가는 밤에 주원의 사고는 풍덩 빠져버렸고 그의 숨은 턱 막혀왔다. 눈을 꾹 감고 다시 크게 떠봤지만 지금 이 상황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니 우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본인이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도 판단이 되지 않았다. 텅 비어있는 지하철역의 벽엔 이번에도 <역삼역>이라고 쓰여있었다. 그의 지하철은 또다시 제자리였다.
서울과 달 사이를 시월의 밤이 빽빽이 메운 채 깊어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빙빙 도는 2호선은 두 가지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운행한다.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은 <내선 순환>,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것을 <외선 순환>이라고 하는데, 주원이 타고 있는 것은 외선 순환 열차였다. 「반시계」 방향이라서, 자꾸만 뒤로 가는 시간 때문에 열차가 다음 역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하루 종일 원을 그리는 2호선이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없어져 버린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어쨌든 같은 곳을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이 열차에서 내려야 했다. 본인이 지금 술에 너무 취한 것이든, 아침에 당장 정신과를 찾아가야 하든, 아침이 오긴 올까, 어떻든, 이 열차 속에 계속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주원은 이성과 혼란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망설이다가 스크린도어가 닫히기 전에 가까스로 내렸다.
일단 내리면 뭔가 괜찮아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야만 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제대로 된 현실이라면 지금 주원이 겪고 있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리는 없다. <역삼역>에서 <선릉역>으로 출발했던 지하철이 역삼역에 도착할 수는 없다. 두 번씩이나. 어쩌면 자신이 자고 있던 동안에도 몇 번이나 그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그가 여태껏 살아왔던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건 무조건 자신의 착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설명이 안 되니까. 그러니까 일단 역 밖으로 나가봐야 한다. '안내방송이 뭔가 잘못됐었던 걸까, 내가 잘못 들었을까, 내가 역 이름을 잘못 봤던 걸까.' 관자놀이에 땀이 주륵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땀을 흘리는 이유는 혹시라도 지금 이 상황이 그의 착각이 아닐까봐서였다. 정말로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는 걸까봐서였다.
두 칸, 세 칸씩 급한 보폭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계속 주변을 둘러봤지만, 지하철역 구석구석 그 어디에도, 그 누구도 없었다. 그의 구두 소리만이 복도의 반대편까지 울려 퍼질 뿐이었다. 고객안전실에도 직원은 보이지 않았고, 대합실에도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왜 모든 문은 열려있고 불이란 불은 다 켜진 채로 일까. 핸드폰을 체크했다. 12시 7분. '12시 7분?' 민재에게 전화를 하였으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새로고침을 계속해서 눌러봐도 인터넷에 별다른 뉴스는 뜨지 않고 있다. 그러고 보니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열차의 운전실을 체크해 볼 걸 그랬다. 열차가 움직이고 있었으니 반드시 기관사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역 밖으로 일단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주원은 자신의 집 방향인 1번 출구로 나왔다. 서늘하고 무거운 어둠에 휩싸인 역삼역 주변에도 역시나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길게 펼쳐진 <테헤란로>에 차가 한 대도 없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의 불행한 예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 길에 차가 한 대도 없을 리 없었다. 자신이 잠든 사이 세상의 무언가가 뒤엉켜버렸다. 영화 <바닐라 스카이>가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도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세상이 그대로인 채로 모두가 사라지고 본인만이 도시에 남겨지게 된 주인공은 나중에 이것이 그의 꿈이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그랬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본 지가 오래되어 주원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꿈일 리 없었다. 차가운 공기와 상관없이 그는 식은땀을 계속 흘리고 있었고, 심장은 가슴을 뚫고 나올 듯이 쿵쾅대고 있었으며, 벌어진 입으로 거칠게 숨 쉬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너무나도 조용해 그의 숨소리가 몹시 크게 들렸다. 지금 이 상황이 나중에 과연 어떤 설명으로 소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게 그냥 이렇게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분이 막연히 들었다. 동시에 「나중」이 과연 있을까 하는 불안과 의문도 있었다.
집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주원은 무릎을 굽혀 대로 옆 블록 위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으로 지도 앱을 켰다. 현 위치에서 집에 도착지를 설정하니 걸어서 1.5킬로라고 안내했다. 옆으로 매고 있던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고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여전히 심장은 트램펄린 위 과체중 아이처럼 자신의 가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힐 듯이 방방 뛰고 있었다. <팔리아멘트>에 불을 붙여 깊게 들이마시고 연기를 내뱉었다. 머리가 띵 해왔다. 자꾸만 초점이 흐려져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한 모금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며 눈을 뜨고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주원은 자신이 본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녔다. 핸드폰의 시계는 12시 7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아까 역에서 나올 때가 12시 7분이었는데?’ 왼쪽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봤다. 역시나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손목시계의 시침은 분명히 일초, 또 일초 움직이고 있다.
‘누가 내 술에 약이라도 탄 건가?’ 아까 분명 이건 꿈일 리 없다고 단정 지었으니, 그렇다면 자신은 일종의 환각 상태인 것일까? 그래, 그게 말이 안 되는 지금 모든 상황 중 그나마 가장 말이 되는 설정이었다. 주원은 초조하게 담배 연기를 마시고 내뱉으며 핸드폰의 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분이 6에서 7로 바뀌었다.
‘제발…. 제발….’ 자신의 손목시계 역시 이제 7분으로 바늘을 옮겨갔다. 손목시계가 대략 15초 정도 느리게 세팅이 되어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주원은 액정에 금이 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세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잡고 다시금 노려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들고 있던 담배에서 재가 떨어졌다. 그리고 주원은 그대로 담배를 밟아 불을 꺼버렸다. 무거운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고 바람이 휘잉 하고 불었다. 땀은 여전히 그의 이마와 목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화면만 계속 뚫어져라 주시하니 핸드폰의 주변 배경이 마치 아웃포커싱 되듯이 흐려졌다.
주원은 ‘제발... 제발...’을 마음속으로 외쳤다. 바로 그때, 핸드폰의 12:7의 7은 6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잠시 뒤 8과 가까워지던 그의 시곗바늘 역시 8에 안착하지 못하고 6과 7 사이로 되돌아갔다. 정확히 묘사를 하자면, 바늘은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방방 뛰던 심장이 쿵 하고 심해 바닥에 떨어진 듯이 무거워졌다. 양 무릎을 두 손바닥으로 딛고 일어나 엉덩이를 툴툴 털었다. 가방을 왼쪽 어깨에 메고 선릉역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트루먼쇼>가 생각났다. 영화를 많이 봐온 주원은 평상시에도 어떤 상황에 부닥치면 비슷한 상황에 처한 영화의 주인공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 짐 캐리가 연기했던 주인공의 인생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된다는 내용의 영화였는데, 그를 제외한 그의 주변인 모두, 세상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를 속이고 있었다.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주원은 계속 걸어가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메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지, 이 도시는 사실 한 평의 사각지대도 없을 정도로 CCTV로 둘러싸여 있지 않은가. 혹시 이게 정말로 몰래카메라였다면, 정말 대단하다. 화내지 않을 테니 이제 그만하시죠. 박수라도 쳐줄게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셨어요. 하지만 제발 이제 끝내줬으면.' 괜한 마음에 걸음을 멈추고 소리를 내질렀다.
“이제 나와!” 그의 목소리가 텅 빈 테헤란로를 날카롭게 가로질렀지만 이내 무거운 밤공기에 꼬꾸라졌다.
“그만해!”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 주원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주원은 뚜벅뚜벅 울리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밤의 어둠을 헤쳐 나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근본적인 질문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 버린 걸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든, 불도 끄지 않고 다들 사라진 것을 보면 급작스러운 일이 분명했다. ‘모두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어디든지 간에, 도로에 차 한 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차를 타고 간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휴거라도 일어난 것일까. 세상에 죄인이 주원 단 한 명이었던 걸까. 모두 손에 손잡고 저 구름 위로 떠버린 것일까. 주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나쁘게 살지 않았다. 출구가 없는 답답함에 슬슬 화까지 나기 시작했다.
편의점도, 식당도, 열려있는 가게들이 많았다. 그게 정상이었다. 문제는 그 안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주원은 사람을 찾아 닥치는 대로 불이 켜져 있는 곳에 들어가 봤다. 고깃집엔 불판 위에 불이 켜진 채로 고기가 올려져 있었고, 술잔에는 술이 담겨 있었으며, 주방에도 불이 켜진 채로 된장국이 끓고 있었다. 주원은 애써 불을 끄지 않았다. 가게에 불이 난다면 소방차라도 혹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편의점에도 물론 손님도, 점원도 없었다. 그의 시계는 여전히 12시 6분과 8분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편의점의 시계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혹시나 깜빡이는 불이 있지 않을까 했다. 대로변의 양쪽을 거대한 벽처럼 빽빽이 메우고 서있는 모든 빌딩과 오피스텔, 그리고 아파트의 창문들을 유심히 살폈다. 불이 꺼지거나 켜졌다면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말일 텐데,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라진 건 사람들뿐만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이렇게까지 크게 퍼지는 것은 비단 사람들이 사라졌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에겐 그 어떤 벌레 소리도,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 밑에서 맴돌고 있어야 할 날벌레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식당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어야 할 비둘기들 마저도 단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를 봐주고 있는 것은 밤하늘에 달뿐이었다. 그 달도 초승달인지 그믐달인지 하여간 너무나 처량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치 밤이라는 검은색 천장에 작은 틈으로 빛이 아주 약하게 새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주원은 땅 위에 서서 그와 달 사이를 지나는 구름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구름은 달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가다가 한순간에 다시 왼쪽으로 옮겨갔다. 그것을 달리 설명할 길은 없었다. 하늘에 달이 떠 있고, 그 밑으로 구름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을 가리며 지나갔다. 그리고 그 밑에서 주원이 그것을 지켜보던 중, 구름의 위치가 갑자기 다시 왼쪽으로 옮겨갔다. 오른쪽으로 옮겨가기 전의 자리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스르르 방향을 바꾼 것이 아녔다. 말하자면 「순간이동」을 한 것이다. 마치 그의 시곗바늘과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