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달 사이 2
하루 종일 빙빙 도는 2호선은 두 가지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운행한다.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은 <내선 순환>,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것을 <외선 순환>이라고 하는데, 주원이 타고 있는 것은 외선 순환 열차였다. 「반시계」 방향이라서, 자꾸만 뒤로 가는 시간 때문에 열차가 다음 역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하루 종일 원을 그리는 2호선이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없어져 버린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어쨌든 같은 곳을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이 열차에서 내려야 했다. 본인이 지금 술에 너무 취한 것이든, 아침에 당장 정신과를 찾아가야 하든, 아침이 오긴 올까, 어떻든, 이 열차 속에 계속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주원은 이성과 혼란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망설이다가 스크린도어가 닫히기 전에 가까스로 내렸다.
일단 내리면 뭔가 괜찮아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야만 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제대로 된 현실이라면 지금 주원이 겪고 있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리는 없다. <역삼역>에서 <선릉역>으로 출발했던 지하철이 역삼역에 도착할 수는 없다. 두 번씩이나. 어쩌면 자신이 자고 있던 동안에도 몇 번이나 그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그가 여태껏 살아왔던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건 무조건 자신의 착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설명이 안 되니까. 그러니까 일단 역 밖으로 나가봐야 한다. '안내방송이 뭔가 잘못됐었던 걸까, 내가 잘못 들었을까, 내가 역 이름을 잘못 봤던 걸까.' 관자놀이에 땀이 주륵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땀을 흘리는 이유는 혹시라도 지금 이 상황이 그의 착각이 아닐까봐서였다. 정말로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는 걸까봐서였다.
두 칸, 세 칸씩 급한 보폭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계속 주변을 둘러봤지만, 지하철역 구석구석 그 어디에도, 그 누구도 없었다. 그의 구두 소리만이 복도의 반대편까지 울려 퍼질 뿐이었다. 고객안전실에도 직원은 보이지 않았고, 대합실에도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왜 모든 문은 열려있고 불이란 불은 다 켜진 채로 일까. 핸드폰을 체크했다. 12시 7분. '12시 7분?' 민재에게 전화를 하였으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새로고침을 계속해서 눌러봐도 인터넷에 별다른 뉴스는 뜨지 않고 있다. 그러고 보니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열차의 운전실을 체크해 볼 걸 그랬다. 열차가 움직이고 있었으니 반드시 기관사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역 밖으로 일단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주원은 자신의 집 방향인 1번 출구로 나왔다. 서늘하고 무거운 어둠에 휩싸인 역삼역 주변에도 역시나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길게 펼쳐진 <테헤란로>에 차가 한 대도 없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의 불행한 예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 길에 차가 한 대도 없을 리 없었다. 자신이 잠든 사이 세상의 무언가가 뒤엉켜버렸다. 영화 <바닐라 스카이>가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도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세상이 그대로인 채로 모두가 사라지고 본인만이 도시에 남겨지게 된 주인공은 나중에 이것이 그의 꿈이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그랬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본 지가 오래되어 주원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꿈일 리 없었다. 차가운 공기와 상관없이 그는 식은땀을 계속 흘리고 있었고, 심장은 가슴을 뚫고 나올 듯이 쿵쾅대고 있었으며, 벌어진 입으로 거칠게 숨 쉬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너무나도 조용해 그의 숨소리가 몹시 크게 들렸다. 지금 이 상황이 나중에 과연 어떤 설명으로 소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게 그냥 이렇게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분이 막연히 들었다. 동시에 「나중」이 과연 있을까 하는 불안과 의문도 있었다.
집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주원은 무릎을 굽혀 대로 옆 블록 위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으로 지도 앱을 켰다. 현 위치에서 집에 도착지를 설정하니 걸어서 1.5킬로라고 안내했다. 옆으로 매고 있던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고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여전히 심장은 트램펄린 위 과체중 아이처럼 자신의 가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힐 듯이 방방 뛰고 있었다. <팔리아멘트>에 불을 붙여 깊게 들이마시고 연기를 내뱉었다. 머리가 띵 해왔다. 자꾸만 초점이 흐려져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한 모금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며 눈을 뜨고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주원은 자신이 본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녔다. 핸드폰의 시계는 12시 7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아까 역에서 나올 때가 12시 7분이었는데?’ 왼쪽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봤다. 역시나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손목시계의 시침은 분명히 일초, 또 일초 움직이고 있다.
‘누가 내 술에 약이라도 탄 건가?’ 아까 분명 이건 꿈일 리 없다고 단정 지었으니, 그렇다면 자신은 일종의 환각 상태인 것일까? 그래, 그게 말이 안 되는 지금 모든 상황 중 그나마 가장 말이 되는 설정이었다. 주원은 초조하게 담배 연기를 마시고 내뱉으며 핸드폰의 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분이 6에서 7로 바뀌었다.
‘제발…. 제발….’ 자신의 손목시계 역시 이제 7분으로 바늘을 옮겨갔다. 손목시계가 대략 15초 정도 느리게 세팅이 되어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주원은 액정에 금이 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세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잡고 다시금 노려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들고 있던 담배에서 재가 떨어졌다. 그리고 주원은 그대로 담배를 밟아 불을 꺼버렸다. 무거운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고 바람이 휘잉 하고 불었다. 땀은 여전히 그의 이마와 목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화면만 계속 뚫어져라 주시하니 핸드폰의 주변 배경이 마치 아웃포커싱 되듯이 흐려졌다.
주원은 ‘제발... 제발...’을 마음속으로 외쳤다. 바로 그때, 핸드폰의 12:7의 7은 6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잠시 뒤 8과 가까워지던 그의 시곗바늘 역시 8에 안착하지 못하고 6과 7 사이로 되돌아갔다. 정확히 묘사를 하자면, 바늘은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방방 뛰던 심장이 쿵 하고 심해 바닥에 떨어진 듯이 무거워졌다. 양 무릎을 두 손바닥으로 딛고 일어나 엉덩이를 툴툴 털었다. 가방을 왼쪽 어깨에 메고 선릉역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트루먼쇼>가 생각났다. 영화를 많이 봐온 주원은 평상시에도 어떤 상황에 부닥치면 비슷한 상황에 처한 영화의 주인공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 짐 캐리가 연기했던 주인공의 인생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된다는 내용의 영화였는데, 그를 제외한 그의 주변인 모두, 세상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를 속이고 있었다.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주원은 계속 걸어가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메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지, 이 도시는 사실 한 평의 사각지대도 없을 정도로 CCTV로 둘러싸여 있지 않은가. 혹시 이게 정말로 몰래카메라였다면, 정말 대단하다. 화내지 않을 테니 이제 그만하시죠. 박수라도 쳐줄게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셨어요. 하지만 제발 이제 끝내줬으면.' 괜한 마음에 걸음을 멈추고 소리를 내질렀다.
“이제 나와!” 그의 목소리가 텅 빈 테헤란로를 날카롭게 가로질렀지만 이내 무거운 밤공기에 꼬꾸라졌다.
“그만해!”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 주원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주원은 뚜벅뚜벅 울리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밤의 어둠을 헤쳐 나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근본적인 질문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 버린 걸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든, 불도 끄지 않고 다들 사라진 것을 보면 급작스러운 일이 분명했다. ‘모두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어디든지 간에, 도로에 차 한 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차를 타고 간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휴거라도 일어난 것일까. 세상에 죄인이 주원 단 한 명이었던 걸까. 모두 손에 손잡고 저 구름 위로 떠버린 것일까. 주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나쁘게 살지 않았다. 출구가 없는 답답함에 슬슬 화까지 나기 시작했다.
편의점도, 식당도, 열려있는 가게들이 많았다. 그게 정상이었다. 문제는 그 안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주원은 사람을 찾아 닥치는 대로 불이 켜져 있는 곳에 들어가 봤다. 고깃집엔 불판 위에 불이 켜진 채로 고기가 올려져 있었고, 술잔에는 술이 담겨 있었으며, 주방에도 불이 켜진 채로 된장국이 끓고 있었다. 주원은 애써 불을 끄지 않았다. 가게에 불이 난다면 소방차라도 혹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편의점에도 물론 손님도, 점원도 없었다. 그의 시계는 여전히 12시 6분과 8분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편의점의 시계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혹시나 깜빡이는 불이 있지 않을까 했다. 대로변의 양쪽을 거대한 벽처럼 빽빽이 메우고 서있는 모든 빌딩과 오피스텔, 그리고 아파트의 창문들을 유심히 살폈다. 불이 꺼지거나 켜졌다면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말일 텐데,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라진 건 사람들뿐만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이렇게까지 크게 퍼지는 것은 비단 사람들이 사라졌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에겐 그 어떤 벌레 소리도,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 밑에서 맴돌고 있어야 할 날벌레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식당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어야 할 비둘기들 마저도 단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를 봐주고 있는 것은 밤하늘에 달뿐이었다. 그 달도 초승달인지 그믐달인지 하여간 너무나 처량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치 밤이라는 검은색 천장에 작은 틈으로 빛이 아주 약하게 새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주원은 땅 위에 서서 그와 달 사이를 지나는 구름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구름은 달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가다가 한순간에 다시 왼쪽으로 옮겨갔다. 그것을 달리 설명할 길은 없었다. 하늘에 달이 떠 있고, 그 밑으로 구름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을 가리며 지나갔다. 그리고 그 밑에서 주원이 그것을 지켜보던 중, 구름의 위치가 갑자기 다시 왼쪽으로 옮겨갔다. 오른쪽으로 옮겨가기 전의 자리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스르르 방향을 바꾼 것이 아녔다. 말하자면 「순간이동」을 한 것이다. 마치 그의 시곗바늘과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