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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달 사이 3

by 안지안

오늘 밤 고양이 길라는 길 모퉁이의 편의점에 들르지 않았다. 이 시간대의 아르바이트생이라면 인정이 많아서, 길라가 유리로 된 문 밖에서 어슬렁어슬렁 거리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를 보고 나와 그릇에 물과 통조림을 담아 주었다. 그런 그를 길라는 꽤 괜찮은 인간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편의점 말고 가볼 곳이 있다. 길라는 지금 먹을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이다. 확실히 오늘밤의 어둠은 여느 때보다 무겁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밤은 자신의 어머니, 길라가 얘기해 주었던 「그 밤」일지도 모른다.


할머니 길라가 얘기해 주었다고 어머니 길라가 말했다. 그렇다. 고양이들의 이름은 대대손손 엄마 쪽을 통해 전해진다. 고양이들은 어미들의 손에 길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은 하나다. 마치 <마돈나>같이. 「그 밤」은 분명히 있었던 일이고, 여러 번 있었던 일, 그리고 반드시 또 일어날 일이라고 어머니 길라는 말했었다. 길라는 도통 어머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역시 처음엔 할머니 길라의 짓궂은 농담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했다. 자신이 실제로 그 일을 겪기 전까지는. 어머니 길라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녔다. 다만 좀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을까. 혹은 상징적인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어머니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날 밤 갑자기 세상이 사라졌다.’라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아무리 진지한 얼굴로 얘기를 한다고 해도 말이다.


어쨌든 지금, 어머니 길라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그 이야기들과, 그 순간이 도래하기 전에 감지할 수 있는 몇 가지 그 밤의 「징조」들이 기억이 났다. 기억이 난 이상 일단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길라가 기억하는 징조인즉슨, 매미의 울음이 그치고 귀뚜라미가 우는 계절이 시작된 다음에, 달이 두 번째 가늘어지고 다시 차오르기 직전에, 어둠이 유난히 무거운 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는 어둠이 무겁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막상 닥쳐보니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이 바로 「무거운 어둠」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높은 습도 때문에 느껴지는 공기에 대한 얘기가 아녔다. 굳이 따지자면 오늘은 건조한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평소보다 어두운 감은 확실히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무겁다고 표현한 것 또한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느낌, 혹은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무튼 고양이 길라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어둠이 무겁다」는 것을.


어머니 길라는 이 이야기도 했었다. "그건 항상 일정한 때에 시작해. 편의점 옆에 높게 서있는 시계탑이라고 불리는 그걸 보면 알 수 있어. 거기에 짧은바늘과 긴 바늘이 하루종일 돌다가 둘 다 위쪽으로 향할 때, 그때쯤에 밤이 아주 무겁기 시작해."


귀뚜라미들이 울기 시작하면서 어머니가 했던 말이 신경 쓰이긴 했던 길라였지만 그렇다고 매일 밤거리에 앉아서 그의 그 깊은 파란 두 눈으로 시계탑이나 하루종일 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길고양이의 삶은 하루하루 치열했다. 가끔 – 아주 가끔, 문득 생각이 날 때면 어머니 길라를 추억하며 시계탑을 잠깐 봤을 뿐이다. 그런데 하필 오늘밤, 유난히 밤은 무거웠고, 하필이면 시계탑의 두 바늘은 타이밍이 딱 맞게, 위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무심코 그쪽을 바라봤을 뿐인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말했던 건 아마도 그냥 농담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 오늘 어둠은 확실히 무겁긴 했다. 그리고 하필 오늘 뜬 달은 귀뚜라미들이 울기 시작한 뒤로 두 번째 차오르기 직전의 가는 달이다. 평소에 즐겨 찾는 언덕 위 옥탑방으로 달려 올라가면서 계속 아래의 동네 쪽을 내려다봤다. 어찌 됐건 일단 높은 곳에 가서 확인을 해보자. 아니면 마는 것 아닌가.


“길라,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는 거야?” 이 구역의 부엉이 곤이었다.

“언덕 위에 옥탑방에” 길라가 나무 위의 곤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이르지 않아?”

“그래, 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별난 일이군. 내가 도울 일이 있을까?”

길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니야 괜찮아. 잠깐 다녀올 뿐이야.” 부엉이 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같이 구경하러 가자고 권유할 수는 없었다. “아,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어, 금방 다녀올 테니 그동안 먹을거나 좀 부탁해.”

“헛소리가 많이 늘었네, 길라” 곤이 큰 두 눈을 한 번 꿈뻑이고 푸드덕 밤 속으로 날아갔다.


길라는 다시 발을 돌려 달동네라 불리는 이 언덕 위의 작은 계단들을 달렸다. 육중한 어둠을 헤쳐나가야 하는 탓에 평소만큼 빨리 달리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옥탑방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인간들은 이 집에서 살기가 힘든지 주인들이 자주 바뀌곤 했다. 하긴 여름이든 겨울이든 - 그 어떤 계절이든 - 이 언덕을 매일 오르고 내리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가장 최근에 새로 온 옥탑방의 주인은 꽤나 오래 눌어붙어 있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귀뚜라미의 계절이다. 아마도 그의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성향이 한몫했으리라고 길라는 생각했다. 그는 하루종일 기타나 건반을 치면서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는 생활을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아마도 가수 지망생으로서 낮에는 곡을 쓰거나 녹음을 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해가 지고 밤이 되면 그제야 옥탑방에서 나와 빨래를 널고 평상 위에 상을 차리고 브루스터에 참치김치찌개를 자주 끓여 먹었다. 보통 그 타이밍에 자주 나타나는 고양이가 바로 고양이 길라였다. 옥탑방의 청년은 파란 눈을 한 고양이에게 통조림 참치를 나눠주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염분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고양이를 위해서 항상 물까지 떠다 주었다. 길고양이들에게 물을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길라가 헐레벌떡 계단을 올라가 보니 옥탑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의 존재를 소리로 알렸겠으나, 오늘은 우선 할머니와 어머니 길라의 유서 깊은 짓궂은 농담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래야만 남은 여생을 일말의 의문점 없이 맘 편히 살 수 있다. 차가워진 초록색 페인트의 옥상 바닥을 지나 평상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질펀한 공기를 이겨내며 가쁜 숨을 조용히 삼켰다. 밤은 부자연스럽도록 조용했다. 저 아래 도로 위엔 집으로 재촉하는 차들이 몇몇 다니고 있었고 아직 꽤나 많은 집들의 불이 켠 채로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들도 보였고,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묵묵히 길을 가는 이들도 보였다. 고양이 길라는 숨죽인 채 동그래진 두 눈동자로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당탕! 하고 안에서 옥탑방의 아이가 뭔가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였다.

없어졌다.

사라졌다.

사람들이. 모든 동물들도.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던 차들도, 오토바이도. 자전거도.

어디로 숨은 게 아니라 정말로 다들 그냥 한순간에 지워졌다.

갑자기 자신의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길라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다시 확인해 보았다.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정말로.

눈을 깜빡여봤다.

아무도, 그 무엇도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것은 사라진채로 그대로였다.


소름이 길라의 발톱 끝에서부터 다리를 타고 올라 목덜미까지 쫙 타고 올랐다. 몸속 세포의 없던 털들 마저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몸이 파르르 떨렸다. 길라의 어머니도, 할머니 길라도,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말 그대로였다. 세상이 사라졌다.


길라는 옥탑방의 현관문에 귀를 바짝 대어 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풀밭이나 나무 위에서 울던 새와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고양이 길라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청각에 자신이 있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두 귀에 들어오는 세상의 소리에 집중했다. 소리의 부재는 곧 존재의 부재를 뜻했다. 그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나뭇가지가 서로 부대끼는 소리, 바람이 휑한 골목 사이를 훑고 지나는 소리, 가로등의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심장소리였다. 콩닥콩닥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길라의 유난히 큰 두 귀 밖으로 새어 나오는 듯했다. 아니 확신했다. 주변이 너무나 조용한 탓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어둠이 너무나 무거운 탓이었다. 소리가 야음에 뒤섞여 멀리 퍼져나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래에 펼쳐진 동네를 커진 동공으로 구석구석 응시했다. 아파트 단지들이 여전히 숲을 이루고 있었다. 겉으로 언뜻 보기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가로등에도 여전히 불은 켜져 있었고, 주차장에도 차들은 빽빽이 세워져 있었다. 편의점과 옆에 시계탑이 보였다. 방금 자신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질감이 드는 것은 그중에서 움직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시가 정적으로 되자 소음도 사라졌다. 그야말로 정적이 흘렀다. 철재로 된 가게의 셔터가 내려가는 소리, 자동차가 맨홀 뚜껑을 밟고 지나가는 둔탁한 소리, 밤에 우는 새가 우는 소리, 불 꺼진 방 안의 누군가가 마른기침을 하는 소리, 귀가를 재촉하는 발걸음 소리, 그것이 평소의 새벽 도시의 소리였다. 지금은 고양이 길라가 내는 소리가 도시의 소리 그 자체가 되고 있었다.


사라진 것들은 왜 사라졌으며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리고 길라 자신은 왜 그들과 함께 같이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이유가 단순히 자신이 고양이라서가 아니라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이야기를 자신의 어머니는 진작부터 예언처럼 하지 않았는가. 이것엔 필시 「유전적」인 무언가가 얽혀있다.


세상에는 땅에 박혀있는 것들만이 것만이 남아있었다. 울타리, 시든 장미, 깜빡이는 신호등, 고목나무, 아파트, 시계탑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 위를 걸어 다니거나, 기어 다니거나, 굴러다니거나, 날아다니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인간들, 거미, 오토바이, 부엉이 같은 것들 말이다. 부엉이, 그래, 부엉이 곤도 사라졌을까. 고양이 길라는 왔던 길을 우선 되돌아 내려가보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에 자신이 언젠가 이름도 지어주었던 민들레를 발견했다. 꽃잎 하나 남아있지 않은 꽃받침에 코를 대고 뇸뇸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별다른 점은 없었다.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조차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려오느라 언제 왔는지도 모르는 새에 길라는 아까 부엉이 곤을 만났던 자리까지 와있었다. 그게 불과 몇 분 전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곤이 앉아 있던 나무 밑에 죽은 쥐가 두 마리 놓여있었다. 아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마도 끼니를 거른 길라를 위해 곤이 가져다 놓은 것이리라. 물론 길라는 지금 배가 고프지도, 배를 채울 정신도 없었다. 이상하지 않겠는가, 이 와중에 갑자기 밥을 먹는다는 게.

‘고마워, 곤. 조금 이따 가지러 올게.’ 고양이 길라가 “이따”라고 한 것엔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 길라는 이미 이 사건의 끝을 말해주었다.


“결국 모든 것은 제자리로 되돌아온단다.”


그것을 길라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더더욱. 그럼에도 왠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가 없는 고양이 길라였다. 세상의 모든 게 사라졌다가 되돌아온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그런 일이 있다. 그러니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살란 말인가. 믿어야만 하겠지. 하지만 어찌 그리 쉽게 그럴 수 있겠는가. 받아들이고 덮어두고 살면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세상의 모두가 사라지고 본인만 남았다면, 누가 봐도 고양이 길라 자신이 그것의 이유, 최소한 연관이 있지 않겠는가. 어머니 길라는 그런 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물어볼 걸 그랬지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어차피 그땐 이런 일이 「말 그대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지도 않았었으니까. 세상이 되돌아온다 하더라도 길라가 과연 예전과 같은 삶을 되돌려 받을 수 있을까. 세상을 과연 예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달동네의 굽이굽이 진 골목골목엔 낡고 헌것들이 빽빽했다. 오래된 사다리나 썩어가는 창틀, 말라죽은 화분 같은 것들, 쓰임새를 잃은 것들, 그렇다고 버려진 것도 아닌 애매한 것들이 가만히 방치되어 있었다. 버린 것인지 버린 건 아닌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 애매한 것들이 많았다. 오래된 집들엔 불이 켜져 있기도 꺼져있기도 했지만, 그 안에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인기척도 없었다. 깊숙한 골목의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히는 주황색 가로등 아래에도 벌레 한 마리 날지 않았다. 물론 그 밑에 바닥에 벌레 시체들만은 널부러져 있었다.


고양이 길라는 달동네라 불리는 이 산비탈의 좁고 높은 계단들을 어느새 다 내려와 있었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옥탑방은 이제 까마득히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 너머로 떠 있는 동쪽 하늘의 가냘픈 달이었다. 왜 정작 달동네 꼭대기까지 올라가서는 그게 보이지 않았을까. 그 희미한 달빛 아래로 찢어진 모양의 구름이 사양 않고 지나가고 있었다. 길라는 홀리기라도 한 듯 그것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리고 구름은 순식간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스르르 미끄러져간 게 아녔다. 오른쪽에 있던 것이 휙 하고 사라지면서 동시에 왼쪽에 휙 하고 나타났다. 그것은 어머니 길라가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순간, 밤이라는 것이 더 이상 그저 해가 지고 해가 뜨기 전의 어두운 시간을 일컫는 추상적인 개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밤은 그보다 더 명확히, 엄연하게 「실체」하고 있는 무언가라는 것이 고양이 길라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다. 마치 짙은 회색 털을 하고 파란색 눈을 한 고양이가 단순히 <길라>라는 명칭이 아니고 길라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듯이 말이다. 길라는 밤이라는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밤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지금 중요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길라가 어찌할 방도는 없었다.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어찌 달리 생각할 수도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는 무거운 비밀이 적어도 한 가지 꽁꽁 숨겨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곳 서울, 저 위 달, 그리고 그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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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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