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달 사이 4
올라가는 버튼을 눌러 12층에 멈춰 서있는 엘리베이터를 호출했다. 아마도 이미 다들 잠에 든 듯, 1층의 양쪽 두 집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12층에는 누가 살까. 유정은 8층에 살기 때문에 8층 위로는 누가 몇층에 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물론 그렇게 따지면 8층 아래로도 마찬가지였다. 오후 두 시쯤은 돼서야 집을 나서고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생활을 3년째 반복하고 있는 유정은 엘리베이터를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탈 일이 잘 없었다. 12층에는 누가 살까. 누군가는 살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그곳에 멈춰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있는 곳엔 사람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린지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들어 층 표시기를 확인했다. 왠일인지 빨간색 디지털 숫자는 12층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유정은 아까 자신이 분명히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눌렀다면 1층으로 내려왔겠지. 그러니, 누르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버튼을 꾹 눌러 이번엔 제대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12, 11, 10... 이번에는 틀림없이 내려오고 있다. 그때, 층 표시기가 이상한 행동을 했다. 8 다음에 7로 표시되어야 할 숫자가 갑자기 12로 점프를 한 것이다. 정말 기이하게도 엘리베이터의 도르래와 로프가 움직이는 소리 역시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유정은 올라가는 버튼을 다시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내려오기 시작했고, 12, 11, 10... 이번엔 또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9층, 8층, 7층을 지나 1층에 도착하여 천연덕스럽게 문을 활짝 열어 복도를 환하게 밝혔다. 영문 모를 행동을 하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과연 타도될까. 유정은 잠시 고민을 한 뒤 뒤돌아서 계단을 직접 올라가기로 했다. 한밤중에 엘리베이터에 갇히거나 하는 일은 사양이었다. 엘리베이터 역시 좋을 대로 하라는 듯 냉정하게 문을 닫아버렸다.
8층을 올라오는 동안 몇 번이나 엘리베이터를 호출하려했는지 모른다. 숨을 깊이 몰아쉬며 겨우 집에 도착한 유정이 현관문을 열자마자 했던 후회는 오는 길에 맥주를 사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선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나약함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겨자색 카디건을 바로 벗어서 스탠드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항상 켜진 채로 있는 거실의 주황색 조명이 담담히 그녀를 반겼다. 그녀의 집은 아파트의 낡은 외관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거실의 바닥엔 비싸 보이는 재질의 러그가 깔려 있었다. 아담한 2인용 소파가 한쪽 벽에 붙어있었고, 다른 쪽 벽엔 책장과 책상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부엌과 거실 사이에 놓인 간소한 정사각형의 다이닝 테이블 위에 자신의 버건디색 사첼 백을 올려두며 그 위에 조그만 초록색 갓을 쓴 스탠드에 불을 켰다. 딱 이 정도 밝기가 적당했다. 그녀는 자신의 집이 너무 환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그녀는 괜히 한 번 냉장고의 문을 열어 비어있는 것을 굳이 두 눈으로 확인했다.
체념한 유정은 따뜻하게 반신욕이나 할 요량으로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물의 온도는 조절할 필요 없이 물소리가 아래 집에 시끄럽지 않을 정도로 수도꼭지를 적당히 틀기만 하면 됐다. 그녀는 사계절 언제나 같은 온도로 목욕을 했다. 욕실 문을 닫고 나와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오후에 엄마에게서 왔던 문자에 아직 답장하지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유정아 이번 주에 한 번 들려서 반찬 좀 가져가. 너 좋아하는 고등어조림 해놨어.’
유정의 엄마는 가을에만 고등어조림을 해줬다. 고등어조림뿐만이 아니라, 모든 계절엔 그 철을 대표하는 메뉴를 몇 개씩 정해서 그 음식들은 절대로 다른 계절엔 하지 않았다. 「절대로」까지 안 할 이유는 뭔가. 게다가 「고등어조림」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콩국수를 여름에만 만들었다면 그것은 계절 메뉴로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전어라면 아마도 가을에 먹겠지. 군고구마라면 보통 겨울에만 먹을 것이다. 하지만 고등어조림은 1월에도, 3월에도, 7월에 먹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요리이다. 물론 「가을 무」가 맛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고등어조림의 메인은 「무」다. 이름이 「고등어」 조림이라고 해도.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엄마는 어째서 가을을 빼고는 이 조림을 해주지 않는 것일까. 겨울에도 수박이 먹고 싶다면 먹으면 되는데 말이다.
어쨌든 유정은 고등어조림을 좋아했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답장을 보냈다. '토요일쯤에 갈게 엄마. 잘 자요.' 엄마는 재촉하진 않아도 답장이 아예 없으면 걱정을 했다. 그때 문득 유정의 머릿속에 예전에 엄마가 보내줬던 김치를 김치냉장고에 넣어놓고 아직 한 번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김치냉장고 안에 저번에 넣어둔 와인이 하나 있었다는 게 비로소 생각났다. 유정은 재빠르게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나이스.’ 언젠가 편의점에서 즉흥적으로 사 왔던 구천 원 짜리 와인이 김치통 위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 내내 했던 '알코올 중독은 되지 않겠다'던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거침없이 병뚜껑을 비틀어 따버렸다. 그리고 스템이 없는 와인잔에 대략 이천 오백 원어치 와인을 콸콸 따랐다. 이 모든 건 엘리베이터 고장 때문이라고 유정은 스스로 생각했다. 엘리베이터 때문에 계단을 올라와야 했고 그 때문에 생긴 갈증 때문에 맥주 생각이 난 거야. 그러다 결국 와인이라도 마시게 된 거지. 그녀는 그 기다랗고 가는 자신의 목으로 잘도 와인을 꿀꺽꿀꺽 넘겼다. 그래도 양심은 있으니 딱 반병만 마실 계획이다.
어쩐 일인지 욕조에 물이 전혀 찬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생각보다 별로 지나지 않은 걸까. 물을 너무 약하게 틀어놓은 것일까. 어쨌든 마개는 틀림없이 꽉 막혀있다. 결국 도착하게 되어있는 버스와 마찬가지로, 욕조의 물도 결국엔 찰 것이다. 차면 그만이다. 욕실의 문을 다시 닫고 나와 베란다의 창가로 향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잔이 금방 비었다. 창문을 열자 바람에 나무가 으스스 떠는소리가 들렸다. 8층의 뷰라고 해봤자 아파트의 주차장과 맞은 편의 다른 동 건물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유정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인간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사는 풍경은 좋아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네는 조용했다. 아니, 오늘은 특히나 더 고요했다.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니, 확실히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적막이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하고 있는 정도가 아녔다. 모두가 동시에 아예 숨을 참고 숨 쉬는 소리조차도 내지 않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구가 돌아가기를 그만둔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늘에는 손톱 같은 모양의 달이 맞은편 아파트 건물 위에 간신히, 외로이 떠 있었다. 힘겨워 보였다. 꽤 많은 집들의 불이 아직 켜져 있었다. ‘저 중에도 나처럼 앞으로 남은 일생동안 새로운 감정은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럴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가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그 어떤 위로도 되어주진 않았다. 타인은 타인일 뿐이니까.
그때였다. 아마도 잘못 본 것이겠지만, 그 간신히 떠 있는 그믐달 아래를 지나가던 구름이 순식간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자신의 큰 두 눈을 감고 왼손으로 가볍게 마사지했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빈 잔에 와인을 따르러 거실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하지만 어째서 테이블 위에 놓은 와인 잔에는 어느새 와인이 가득 차 있는 것일까. 욕조 안에 물은 왜 여전히 조금도 차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