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달 사이 5
오늘 밤 고양이 길라는 길 모퉁이의 편의점에 들르지 않았다. 이 시간대의 아르바이트생이라면 인정이 많아서, 길라가 유리로 된 문 밖에서 어슬렁어슬렁 거리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를 보고 나와 그릇에 물과 통조림을 담아 주었다. 그런 그를 길라는 꽤 괜찮은 인간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편의점 말고 가볼 곳이 있다. 길라는 지금 먹을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이다. 확실히 오늘밤의 어둠은 여느 때보다 무겁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밤은 자신의 어머니, 길라가 얘기해 주었던 「그 밤」일지도 모른다.
할머니 길라가 얘기해 주었다고 어머니 길라가 말했다. 그렇다. 고양이들의 이름은 대대손손 엄마 쪽을 통해 전해진다. 고양이들은 어미들의 손에 길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은 하나다. 마치 <마돈나>같이. 「그 밤」은 분명히 있었던 일이고, 여러 번 있었던 일, 그리고 반드시 또 일어날 일이라고 어머니 길라는 말했었다. 길라는 도통 어머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역시 처음엔 할머니 길라의 짓궂은 농담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했다. 자신이 실제로 그 일을 겪기 전까지는. 어머니 길라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녔다. 다만 좀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을까. 혹은 상징적인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어머니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날 밤 갑자기 세상이 사라졌다.’라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아무리 진지한 얼굴로 얘기를 한다고 해도 말이다.
어쨌든 지금, 어머니 길라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그 이야기들과, 그 순간이 도래하기 전에 감지할 수 있는 몇 가지 그 밤의 「징조」들이 기억이 났다. 기억이 난 이상 일단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길라가 기억하는 징조인즉슨, 매미의 울음이 그치고 귀뚜라미가 우는 계절이 시작된 다음에, 달이 두 번째 가늘어지고 다시 차오르기 직전에, 어둠이 유난히 무거운 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는 어둠이 무겁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막상 닥쳐보니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이 바로 「무거운 어둠」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높은 습도 때문에 느껴지는 공기에 대한 얘기가 아녔다. 굳이 따지자면 오늘은 건조한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평소보다 어두운 감은 확실히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무겁다고 표현한 것 또한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느낌, 혹은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무튼 고양이 길라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어둠이 무겁다」는 것을.
어머니 길라는 이 이야기도 했었다. "그건 항상 일정한 때에 시작해. 편의점 옆에 높게 서있는 시계탑이라고 불리는 그걸 보면 알 수 있어. 거기에 짧은바늘과 긴 바늘이 하루종일 돌다가 둘 다 위쪽으로 향할 때, 그때쯤에 밤이 아주 무겁기 시작해."
귀뚜라미들이 울기 시작하면서 어머니가 했던 말이 신경 쓰이긴 했던 길라였지만 그렇다고 매일 밤거리에 앉아서 그의 그 깊은 파란 두 눈으로 시계탑이나 하루종일 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길고양이의 삶은 하루하루 치열했다. 가끔 – 아주 가끔, 문득 생각이 날 때면 어머니 길라를 추억하며 시계탑을 잠깐 봤을 뿐이다. 그런데 하필 오늘밤, 유난히 밤은 무거웠고, 하필이면 시계탑의 두 바늘은 타이밍이 딱 맞게, 위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무심코 그쪽을 바라봤을 뿐인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말했던 건 아마도 그냥 농담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 오늘 어둠은 확실히 무겁긴 했다. 그리고 하필 오늘 뜬 달은 귀뚜라미들이 울기 시작한 뒤로 두 번째 차오르기 직전의 가는 달이다. 평소에 즐겨 찾는 언덕 위 옥탑방으로 달려 올라가면서 계속 아래의 동네 쪽을 내려다봤다. 어찌 됐건 일단 높은 곳에 가서 확인을 해보자. 아니면 마는 것 아닌가.
“길라,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는 거야?” 이 구역의 부엉이 곤이었다.
“언덕 위에 옥탑방에” 길라가 나무 위의 곤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이르지 않아?”
“그래, 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별난 일이군. 내가 도울 일이 있을까?”
길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니야 괜찮아. 잠깐 다녀올 뿐이야.” 부엉이 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같이 구경하러 가자고 권유할 수는 없었다. “아,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어, 금방 다녀올 테니 그동안 먹을거나 좀 부탁해.”
“헛소리가 많이 늘었네, 길라” 곤이 큰 두 눈을 한 번 꿈뻑이고 푸드덕 밤 속으로 날아갔다.
길라는 다시 발을 돌려 달동네라 불리는 이 언덕 위의 작은 계단들을 달렸다. 육중한 어둠을 헤쳐나가야 하는 탓에 평소만큼 빨리 달리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옥탑방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인간들은 이 집에서 살기가 힘든지 주인들이 자주 바뀌곤 했다. 하긴 여름이든 겨울이든 - 그 어떤 계절이든 - 이 언덕을 매일 오르고 내리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가장 최근에 새로 온 옥탑방의 주인은 꽤나 오래 눌어붙어 있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귀뚜라미의 계절이다. 아마도 그의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성향이 한몫했으리라고 길라는 생각했다. 그는 하루종일 기타나 건반을 치면서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는 생활을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아마도 가수 지망생으로서 낮에는 곡을 쓰거나 녹음을 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해가 지고 밤이 되면 그제야 옥탑방에서 나와 빨래를 널고 평상 위에 상을 차리고 브루스터에 참치김치찌개를 자주 끓여 먹었다. 보통 그 타이밍에 자주 나타나는 고양이가 바로 고양이 길라였다. 옥탑방의 청년은 파란 눈을 한 고양이에게 통조림 참치를 나눠주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염분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고양이를 위해서 항상 물까지 떠다 주었다. 길고양이들에게 물을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길라가 헐레벌떡 계단을 올라가 보니 옥탑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의 존재를 소리로 알렸겠으나, 오늘은 우선 할머니와 어머니 길라의 유서 깊은 짓궂은 농담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래야만 남은 여생을 일말의 의문점 없이 맘 편히 살 수 있다. 차가워진 초록색 페인트의 옥상 바닥을 지나 평상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질펀한 공기를 이겨내며 가쁜 숨을 조용히 삼켰다. 밤은 부자연스럽도록 조용했다. 저 아래 도로 위엔 집으로 재촉하는 차들이 몇몇 다니고 있었고 아직 꽤나 많은 집들의 불이 켠 채로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들도 보였고,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묵묵히 길을 가는 이들도 보였다. 고양이 길라는 숨죽인 채 동그래진 두 눈동자로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당탕! 하고 안에서 옥탑방의 아이가 뭔가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였다.
없어졌다.
사라졌다.
사람들이. 모든 동물들도.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던 차들도, 오토바이도. 자전거도.
어디로 숨은 게 아니라 정말로 다들 그냥 한순간에 지워졌다.
갑자기 자신의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길라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다시 확인해 보았다.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정말로.
눈을 깜빡여봤다.
아무도, 그 무엇도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것은 사라진채로 그대로였다.
소름이 길라의 발톱 끝에서부터 다리를 타고 올라 목덜미까지 쫙 타고 올랐다. 몸속 세포의 없던 털들 마저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몸이 파르르 떨렸다. 길라의 어머니도, 할머니 길라도,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말 그대로였다. 세상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