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합주가 끝난 직후의 연습실은 낯설 만큼 조용했다. 바닥에 놓인 의자 몇 개, 구석에 세워진 악기 케이스들,
서둘러 빠져나간 아이들의 발자국만 공기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안에 남은 건 두 사람. 하연과 은결뿐이었다.
하연은 말없이 케이스 뚜껑을 열었다.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정적 속에 또렷이 울렸다. 검은 벨벳 안감 위에서 활을 조심스레 꺼냈다. 손끝에 맺힌 미세한 긴장감이, 말로 꺼내지 못한 감정 대신 활 끝으로 흘렀다.
무언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말보다 먼저 움직인 건 손이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혼자 ‘사랑의 슬픔’을 켰다.
첫 음이 울릴 때, 은결은 가방 끈을 어깨에 걸친 채 멈춰 섰다. 첼로 케이스를 매려던 손이 굳었다.
바이올린 소리가 등에 닿았고, 그 소리는 등에 닿아 마음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하연이 보였다.
반쯤 닫힌 블라인드 틈 사이로 늦봄의 햇살이 기울어져 들어왔다. 먼지가 떠다니는 공기 속, 빛은 하연의 어깨와 손끝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바이올린을 켜는 손의 움직임은 부드러웠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옆얼굴은 은결의 기억 속보다도 더 선명했다.
하연의 선율이 조용히 물었다.
‘괜찮아?’
‘왜 나를 피했어?’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은결은 천천히 가방을 내려놓았다. 케이스의 고리를 풀며 손끝이 떨렸다. 그 떨림은 낯설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이제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첼로를 꺼내 무릎에 얹었다. 활을 잡는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조심스레, 마치 무언가를 다시 만지는 듯한 감각으로.
하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놀라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은결이 활을 올리는 걸 지켜보며 가슴 어딘가가 뜨겁게 울렸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두 악기의 소리가 서서히 얽혔다.
어색했던 공기가 녹아내렸다. 하연의 바이올린은 은결의 첼로 위를 조용히 감쌌다. 첨예한 선율이 아닌,
어디에도 날을 세우지 않는 따뜻한 흐름이었다.
은결의 첼로는 예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웠다. 미안함이, 후회가, 그리고 그리움이 소리마다 배어 나왔다.
하연의 바이올린이 그 첼로를 이해하듯 따라갔다. 멜로디는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포근히 안아주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이 곡은 둘만의 언어가 되어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하연은 고개를 숙였다.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 호흡 끝엔, 말로 담기 어려운 것들이 가득했다.
“… 그날, 왜 그랬어?”
목소리는 작았지만, 곧바로 귓가에 닿았다. 들키고 싶지 않은 떨림이 묻어 있었다.
은결은 대답을 망설였다. 바닥만 바라보며 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너무…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목소리는 낮고 정직했다. 너무 솔직해서, 하연의 가슴을 베었다.
하연은 그를 바라봤다.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피한 이유가, 싫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였다는 걸.
“나는… 더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그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말없이 마주 본 시선 속에서. 둘의 감정이 처음으로 맨살처럼 드러났다.
은결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엔 놀람, 망설임,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두근거림이 담겨 있었다.
“나도.”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 뒤로 둘은 아무 말 없이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악기는 무릎 위에 놓인 채, 음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지만 공기 속엔 여전히 두 사람의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날의 침묵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