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어멍의 잔소리

by 안 희





화북 어멍집에 있는 텔레비전은 열일을 합니다. 올림픽을 보거나 영화를 볼 때처럼 큰 화면이 필요할 때만 켜지는 우리 집 텔레비전과 달리 화북 어멍집에 있는 TV는 사람이 집 안에 있을 때 늘 켜져 있습니다. 가끔씩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생기면 본방을 사수하는 희한한 버릇이 있는데 요즘에는 <알쓸인잡>과 <캐나다체크인>에 빠져 있습니다. 보지도 않는 홈쇼핑 채널을 틀어놓고 꿈벅꿈벅 졸고 있는 어멍 손에 쥐어있는 리모컨을 빼내어 채널을 몰래 돌립니다. 이번 주 대화의 주제는 '사랑' 입니다.


"우리는 어떤 인간을 사랑할까?"


패널 분들의 대화를 엿보는 것도 재밌고 사이사이 대화에 끼는 것도 재밌습니다. 가끔씩 던지는 질문에 혼자 곰곰히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사랑? 사랑이 뭐지?"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이 뭐냐는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있는 기억이 없는 것 같아 왠지 슬펐습니다. 어떤 사랑의 인상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인걸까요?'





'방관'이라는 방식으로 길러진 나는 평생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잔소리를 듣는 일이 너무 어색합니다. 제주도 어멍은 다릅니다. '보통의 엄마'죠. 솔직히 죽겠습니다.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말들을 아침부터 밤까지 듣고 있자니 매일이 '수련'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시집은 안 가냐, 냉장고에 있는 음식은 왜 안 먹냐, 그거 먹어서 되겠냐, 책은 대학 가려고 공부하는 거냐..' 안 해도 되는 말들을 왜 하시는 건지 나를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함인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오일장이 열리는 날 아침, 그날도 말입니다, 빵이 먹고 싶었어요. 계란을 꺼내 스크램블을 하고 냉장고에서 스콘 하나를 꺼냈는데 어멍한테 딱 걸린 거예요. 잔소리총은 장전의 시간조차 필요하지 않나 봅니다. '아침에는 밥을 먹어야 든든하지 빵쪼가리로 되냐, 빵이 뭐가 맛있냐, 그게 뭐가 맛있냐, 나는 줘도 안 먹는다 블라블라블라..' 빵 하나 먹는 게 이런 소리를 들을 일인가요? 뭘 잘 못한 건가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줄 생각도 없었거덩??"


30년 나이차이가 나는 여자 둘의 동거는 쉽지 않네요.


그래도 오일장 구경은 재미있습니다. 앙증맞게 세워진 야채와 과일, 싱싱한 생선, 식물, 동물 등 없는 게 없는 호기심 천국이죠. 정신이 팔려 구경을 하고 있으면 뒤에서 큰 어멍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사줄까?" "먹어라" "이거 먹을래?" 구경하기가 겁이 날 정도로 감시를 당하다 보면 괜찮다는 말 조차 하기가 싫어집니다. 이상합니다. 분명히 날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머리로는 알겠는데 나오는 말은 왜 날카로워지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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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끝나지 않는 레퍼토리에 나도 모르게 터져버렸습니다.


"아 그만해!! 시집 알아서 갈게요. 아 그리고 결혼은 혼자 해?!! 그만 좀 해요 진짜 아아아아!!!"

"하하하하하하"


진심으로 터진 내 짜증에 호탕한 웃음으로 막아버리는 그녀, 보통이 아닙니다. 더 화도 못내게 웃음으로 막다니 아주 치사합니다. 분해하는 나에게 어멍은 나즈막이 이야기를 꺼냅니다.


".. 내가 몇 살 때 시집을 왔는지 안?.. 아방이 술을 술을 얼매나 마시는지.. 주정도 심혀! .. 살다 살다 내가 못살겠다고 친정집으로 도망갔는디 울 어멍이 안 받아주더라?... 그래서 돌아왔지. 맨날 밥 하고 콩 들어간 밥은 또 안먹어 우라질.."


뜬금없는 어멍의 고백,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노랫가락처럼 이어졌습니다. 사이사이가 비어진 말들이 참고 살아온 세월의 침묵처럼 느껴져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한을 노래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맥락 없이 터진 고백이 너무도 투박해서 더 억척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어미로써 노릇을 책임감으로 버텨온 여성, 평생을 역할로 살아온 사람, 나는 이 사람을 꼭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힘든데 왜 나 보고는 시집을 가래?"


"아무리 지랄 같아도 그래도.. 혼자 보다 둘이 나아."


살아온 세월에 대한 희노애락이 잔소리에 묻었나 봅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했고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하는데 안그러고 있으니 오죽 답답했을까요. 한 사람이, 한 여성이 눈에 들어옵니다. 잔소리의 출처는 '사랑'이라는 것도 배운 것 같고요. 훈훈한 공기는 오래가지 못하며 저녁밥을 차리면서 듣기 싫은 잔소리에 귀를 막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생을 그리워했던 '보통의 엄마'는 생각보다 피곤(?) 하지만, 이 사랑이 왠지 마음에 듭니다. 걱정해주고 관심 가져주는 이 말들이 사랑의 화살처럼 느껴진달까요.


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 하나 봐요. 아마도 이상적인 사랑만이 오직 사랑이라 생각하며 선을 그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사랑을 몰라 봤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내 안에도 사랑이 숨 쉬고 있네요. 어멍이 준 사랑의 방식으로 잠자고 있던 다양한 사랑들이 깨어난 것 같습니다.









부지런히 동쪽을 여행하는 중입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동네마다의 분위기가 꽤 다릅니다. 조금 더 발전한 곳도 있고 집과 집 사이의 밀집된 정도가 확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죠. 이번 주에는 하이라이트로 아껴 놓았던 세화에 갔습니다. 12월의 따뜻한 날에 작은 동산 위에서 바라본 바다, 짧은 산책만으로 흠뻑 빠질 조용한 세화의 소리, 식곤증을 닮은 어느 카페의 내려앉은 공기까지 너무 생생했던 하루였어요. 특히 제주의 사계절빛을 다 보고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준 김택화 작가님의 그림들이 너무 기억에 남습니다. 아쉬움은 미련을 만들고 미련은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고 믿으며 오늘의 생생함을 기억하기 위해 큰 숨을 쉬었습니다. 생생하게 기억하는 법은 말로 설명하기를 멈추는 것이라 믿으며 단어는 보고 듣고 맡고 느끼는 것들을 가두어 버린다는 걸 안다는 듯이,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듯이.. 눈과 코로 오늘을 기록합니다. 이곳을 떠날 날이 금방 올 것 같습니다.



16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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