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삼십걸의 시집

by 안 희

3년 전, 제주살이 당시의 기록을 재구성하였습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를 좋아합니다. 매일 다니는 길에서 벗어나기를 습관처럼 하고 계획 없이 내려 낯선 동네의 냄새를 맡습니다. 어슬렁어슬렁. 겨울이 처럼 냄새를 맡으며 가슴 안에 나만의 지도를 지어갑니다.


제주시 화북, 표선과는 다른 느낌의 바다와 동네 분위기가 아직은 새롭습니다. 무엇보다 혼자 생활하던 일상 속에 '누군가' 있다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작지만 귀찮은 일들을 감수해야 하고 크지만 이해받지 못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빼앗기기도 일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스함을 제공하는 어멍하고의 동거는 행복합니다. 아마도 덕분에 안정감을 더 빠르게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저녁을 같이 먹고 냉장고에 만들어진 반찬이 있으며 자기 전 한 이불속에서 시시한 농담을 늘어놓는 일상이 꽤 좋습니다.


지난 3개월의 시간이 문득 짧게 느껴집니다. 이럴 땐 과거를 더 생생하게 재생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들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게 너무 아쉽거든요. 인생은 계획한 대로 절대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이 오늘따라 퍽 가볍게 느껴집니다. 제주의 혹한 겨울을 벌벌 떨며 보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반팔을 입어도 땀이 나는 후끈한 집 안에서 팔자 좋은 날들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예상보다 일찍 서울로 돌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왕복 4시간의 출퇴근의 고통을 막을 방법이 없어 퇴사를 고려하는 중이고 따뜻한 집에서 먹고 자며 놀자니 한심한 인간 같다는 생각이 올라와서 이래저래 고민이 많이 듭니다. 특히나 제주도에서 이러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가 않네요. 이런 고민들을 한 끝에 남은 시간을 더욱더 열심히 여행자로 머물러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화북은 제주도 지도에서 12시와 1시 사이쯤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표선은 동쪽으로 반바퀴 채 가기 전에 있으니 이만큼을 버스로 다녀볼까 합니다. 오늘이 첫날입니다. 무작정 동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어디에서 내릴까 지도를 켰습니다. '가보고 싶은 곳' 하트 표시가 그새 많이 생겨난 것 같아 친근합니다. 신촌에 있는 4.3 유적지를 정하고 정류장에 내렸습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걸어 다니는 지금이 좋아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카메라 렌즈 대신에 눈에 있는 렌즈에 오롯이 담으며 오직 생생하게 재생되는 순간은 바로 지금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습니다.


조천읍 신촌리.

겨우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길 옆으로 올라온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울퉁불퉁 나아진 길을 따라 걸으면 내 시야도 덩달아 꿀렁이는 것 같습니다. 귀여움이 묻은 골목을 걷다 보니 성터가 보입니다. 신촌리의 4.3 성터는 사건당시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직접 돌을 쌓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형태를 알아볼 수도 없이 갈대로 뒤덮어진 성터, 그 안에 의자가 있길래 앉았습니다. 여기서 내려다본 바다는 정말이지 한눈에 모든 걸 '감시' 하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웃고 있는 관광객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리지만 앉아 있는 이곳에서는 웃음이 금지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손길이 닿지 않아 버려진 장소, 상흔을 남기는 방식이 쓸쓸함이어야만 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입 안에 머금으며 성터를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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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의 느낌이 좋았는지 이따금씩 가던 길을 멈추고는 걸어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별 의미 없는 길 위에서도 그렇게 뒤를 돌아보면 왠지 기분이 이상합니다.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면 신기하고 재밌기도 합니다.




제주에는 들개가 참 많습니다. 무섭기도 하고 때로는 안쓰럽기도 하지만 멀리서 마주할 때면 우선 겨울이부터 품으로 챙기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자유로워 보입니다. 안전을 위해 하네스를 찬 것이지만 평생 동안 가보고 싶은 길로 가지 못하는 겨울이에 비하면 왠지 편안해 보입니다. '나도 운전대를 겨울이에게 맡겨볼까?' 이리저리 걷다 평소에 산책이 끝나는 40여분이 지날 때 즈음 의젓하게 집 쪽으로 방향을 이끄는 겨울이가 신기합니다. 그래서 그다음 날도 믿고 운전대를 맡겨봅니다. 어제는 왼쪽, 오늘은 오른쪽으로, 같은 길로 가지 않는 겨울이가 참 여행자 같이 보입니다. 정해놓지 않은 길, 그저 후각을 따라 걷는 겨울이를 바라보며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제주의 들개들 덕분에 보다 나은 산책법을 배운 것 같아요. 겨울이도 같은 마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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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입니다. 한 해를 되돌아보는. 올해는 제주도에 온 것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운 한 해를 보낸 것 같습니다. 20대 보다 30대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최상이 아닌 최선을 선택할 줄 알게 된 태도인 것 같아요. 여전히 이상을 꿈 꾸며 최상을 바라는 마음이야 있지만은 더 이상 포기를 절망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생은 고통 그 자체라는 사실을 카페 안에서 창 밖을 바라보듯이 유유히 받아 드립니다. 나이를 먹는 게 좋아집니다. 정답이 없는 인생 속에서 정답을 찾아 방황하던 복잡하고 불안하던 20대는 한 번으로 충분한 것 같아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디자인하는 일도 좋고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할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해야 할 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마가 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들도 좋습니다. 저.. 정말로 꽤 많이, 편안해진 것 같지 않아요?










시를 통해 나는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 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어딘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은 시는 귀띔해 줬다. 참 고마운 일이다.

공자의 나이 도식에 따르자면 사십 줄은 안정권이다. 미혹되지 않음. 그런데 불혹이란 말이 쓰인 것은 유혹이 그만큼 많아서란다.

나의 스승은 제자의 사십 대 진입을 축하하며 지나 놓고 보니 삼십 대는 어설펐고 사십 대가 제일 왕성했다며 향후 10년을 잘 보내라고 격려하셨다. 박완서도 마흔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알곡 같은 글을 생산했다. 인생 후반전 내내 풍작이었다.


<올드걸의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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