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제주살이를 할 당시의 기록을 재구성하였습니다.
제주살이 5개월 차가 되니 그리움이 슬슬 올라옵니다. 같은 지역에 살면서 안 보는 것과는 다르게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그들의 안부가 무척 궁금해지는 때가 종종 찾아옵니다. 전화 외에는 안부를 들을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통화를 하다 보면 보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납니다. 그리움이 증폭됩니다. 거리감이 마음을 애태우게 하는 것 같아요.
12월 23일, 그와 그녀가 육지를 건너왔습니다. '서로가 최고인 걸 말해서 뭐 해, ' ' 서로를 아끼는 걸 말해서 뭐 해'를 줄여서 '말해 뭐 해'라는 명칭을 지어 만나는 우리 세 사람은 마침내 제주에서 모였습니다. 두 사람이 렌터카를 빌려 내가 사는 집 앞으로 픽업을 왔습니다. 찐한 포옹으로 두 사람을 맞이하니 제법 제주도민 같이 느껴집니다. 'J'형의 그가 짜온 당일치기의 완벽한 코스를 따라 우리는 남쪽으로 출발 했습니다. 쉼 없이 쏟아지는 밀린 이야기들이 차 안의 습기를 만들어냈고 덕분에 바깥에 눈이 얼마나 오는지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었죠. 한라산 근처를 지나가자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야 이거 심각한데? 우리 이러다가 서울 못 가는 거 아니야? 하하하"
한라산의 위엄을 실감하고 싶다면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 동쪽에서 남쪽으로 가로질러 가보면 됩니다. 같은 땅 덩어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날씨가 다르거든요. 역시나 남쪽은 우리를 안심시킬 만큼 화창했습니다. 마음 푹 놓고 시간을 즐겼습니다. 어느덧 아쉬움이 피어날 시간이 다가왔고 그와 그녀를 집에 데려다 줄 비행시간에 맞춰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야금야금 올라가야 했습니다. 피날레는 함덕에서 먹는 흑돼지 맛집이었죠. 그런데 이상합니다. 동쪽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눈발이 거세지면서 차창을 치고 가는 속도가 심각해지는 거예요.
"설마.. 진짜 아니겠지"
사람이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울 정도의 눈발을 맞으면서도 불길한 예감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의 이브인 12월 23일 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그녀의 애인들은 서울에서 그들이 제주에 온 것을 모르는 채 기다리고 있었죠. '어쨌든 공항으로 가긴 해야 하니까' 우리는 무사히 (?)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부디 그들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며 기분 좋게 헤어졌습니다.
그들은 왜 여기에 있는 걸까요?
몇 시간 뒤, 집 앞에 택시 한 대가 섰습니다. 폭설로 인한 비행기 결항을 맞이한 두 사람이 심각한 절망을 떠 앉고 내게로 다시 돌아온 것이었죠. 언니 오빠는 자신들에게 일어난 불행과 절망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일을 마치 내가 지시한 일처럼 느껴져 감히 말을 걸기가 어려웠어요. 맥주캔이 쌓여가도 좀처럼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뉴스와 예약창만 확인할 뿐이었죠. 좀 짜증이 났습니다. 물론 본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 물론, 완전히 알 수는 없겠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에 목매여 있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죠.
"이미 일어난 일이잖아. 그만 걱정하고 여기로 돌아와."
술기운을 빌려 누군가를 부르듯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곧 그 심정이 오죽할까 싶어 이기적인 내 말을 주워 담고 싶어 졌죠.
"나 먼저 잘게. 잘 자."
하늘도 무심하시지. 폭설은 3일 동안 이어졌고 벌써 크리스마스 당일이 되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그들은 무방비 상태로 맞이하게 된 고립에 완전히 백기를 던진 상태가 되었죠. 나름 영화도 보러 가고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식사도 하고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사고 서로에게 선물도 사주는 이벤트까지 했지만 도통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까지 애를 쓰는 데 왜 우울하기만 한 건지, 어쩔 수 없는 오늘을 특별한 기억으로 재탄생시키면 안 되는 건지 답답했습니다. 마치 내가 하는 노력들이 날달걀이 깨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친구들은 섬의 고립을 호되게 당하고는 26일 육지로 겨우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날까지 우리 세 사람은 편히 웃지 못했죠.
집으로 돌아오자 허무감이 밀려왔습니다. 그와 그녀가 돌아간 자리에 남은 건 원망 뿐 이었어요.
'아씨 준비한 크리스마스를 다 망쳤잖아.'
서울로 돌아가 각자 연인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연락이 괘씸해서 써놨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은 제주에서의 첫 크리스마스가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가 났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 크리스마스를 보상받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겨울의 동백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눈 덮인 도로를 달리며 순간순간의 기분 좋음을 느꼈지만 억울함은 풀리지 않았죠.
'왜, 기분이 이렇게 씁쓸하고 싫은걸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은 나 자신 역시 이미 일어난 일을 부정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가 각자 기대했던 크리스마스를 자연에게 헌납하고는 최선을 다해 주어진 오늘을 삼키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언니 오빠에게는 현실을 받아들여라 해놓고 정작 나 자신은 부정하며 탓할 곳을 찾았던 것이었죠. 나 혼자만 노력하고 있다는 착각을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고 투정부린 어리석음이 너무 미안해졌습니다.
내면에 있는 자신의 못되고 나쁜 성질이 타인을 통해 비친다는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뒤숭숭한 감정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그들의 행동과 태도는 꼭 나를 닮아 있었습니다. 이제서야 우리들의 잊지못할 충격의 크리스마스가 완성 된 것 같아요. 자연과 고립의 힘을 영원히 잊지 못할겁니다.
"오빠, 이 정도면 손흥민이 와도 못 가. 그냥 포기해"
17화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