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을 갈래요.
6년 전 결혼을 하고 시댁이 생겼다.
결혼 전부터 친구들의 시댁이야기나 주변에서 말하는 시댁이야기를 많이 접했기에 '시댁이 그렇게 불편한가? 정말 나도 가기 싫을까?'라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집 명절에 본격적으로 투입된 이후부터 "난 반드시 명절에 제사를 지내는 시댁을 가진 남자랑 결혼할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명절에 제사를 지내는 시댁에 시집을 가서 힘든 인생을 보내시는 모든 며느리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만큼 나의 명절도 내 입장에서는 힘들었기에 그런 망언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원래 사람은 자기가 겪지 않은 일의 힘듦이 어떠한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결혼 후에도 누군가가 명절에 "친정을 갈래? 시댁을 갈래?"라고 묻는다면,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댁이요!"
라고 대답할 위인이었다.
그럼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러한 망언을 하는 건지 [명절 시리즈물]을 써보도록 하겠다.
#1
우리 집은 내가 갓난아기 시절부터 '떡집'을 했다.
손재주가 좋고, 손맛이 좋은 아빠 엄마의 떡은 인기가 많았고, 6살 무렵 이사 온 곳에 개업한 떡집은 매우 잘됐다.
물론 떡도 맛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김밥전문점이 따로 없기에, 떡집에서 김밥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우리 집 김밥은 인기가 많아서, 출근하는 이른 아침시간에는 길게 줄을 서있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우리 집 창문에서 바로 가게가 보였기에 매일 그걸 구경하는 게 나름 재미있었다.
나는 항상 엄마의 껌딱지였다.
학교 가기 전에도 들리는 건 당연했고, 학교 다녀와서도 가게에 가서 하루 종일 조잘조잘 엄마와 이야기하는 게 내 일과였다.
그러다 보면 엄마가 하는 일이 재미있어 보일 때가 있어서, 어떤 날에는 "엄마, 내가 시루 닦아보면 안 돼?" 하며 시루도 닦아 보고, 어떤 날에는 "내가 떡에 도장 찍어보면 안 돼?"하고 도장도 찍어보고, 별의별 일을 다 해보겠다며 엄마를 괴롭혔다.
그런데, 잘했다. 어렸지만, 손 끝이 야무졌던 나는 시키는 일을 곧 잘 해냈다.
그게 문제였다.
또래에 비해 키도 크고, 노안인 탓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손 끝이 야무진 나는 11살(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엄마 일을 많~~~ 이 도와주게 되었고, 장사까지 하게 되었다.
물론, 엄마가 시장을 보러 가거나, 은행에 볼 일을 보러 갈 때 잠시 뿐이었지만 그 시간이 나에겐 매우 길었던 걸로 기억한다. 혹시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불 안 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키가 크고, 노안이라지만 어른들 눈에는 어린애가 장사한답시고 떡을 담아주는 폼이 영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도시락에 미리 포장되어 있지 않았고, 큰 판에 떡을 펼쳐놓고 원하는 만큼 담아서 파는 시절이었다.
손님이 "3,000원어치 주세요~"하면, 투명 봉지를 뜯어서 떡을 담고 저울에 올려 알맞은 양을 담은 후 손님에게 건넸다.
어떤 날은 어린 나를 믿지 못하는 손님이 "얘~ 너 제대로 담은 거 맞니? 더 적게 담은 거 아니야?"라고 세상 못 믿겠다는 말투로 이야기를 하면, 존심이 매우 쎘던, 일을 못한다는 말은 절대 용납할 수 없던, 어린 나는 저울에 다시 그 떡을 퍽! 올리며 "보세요~~ 더 담아드렸거든요? 엄마가 더 담아서 인심 좋게 주는 거라고 가르쳐 주셨어요!"라고 말대답을 했다.
그러면 저울의 눈금을 확인한 손님은 멋쩍은 표정으로, "어어? 그러네~ 미안~ 아줌마가 오해했네"하며 떡을 받아 들곤 쏜살같이 사라졌었다.
이렇게 당찬 모습으로 엄마 가게를 봐주던 나는 손님들과 나름의 티키타카를 하며 장사의 기술이 점점 늘었고, 엄마가 나에게 가게를 맡기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어떨 때는 주말 하루 종일이 될 때도 있었고, 나한테 맡기고 여행을 간 적도 있었다.
그렇게 시키는 일들을 너무 잘해버린 나는, 중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본격적으로 명절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중에 크면 명절에 제사를 지내는 곳에 시집을 가겠노라!!'라고 생각한 것이.
제사를 지내는 시댁에 시집을 가면, 그래도 예의상 부모님이 '시댁에 가서 일손을 도우라'며 해방시켜 줄 것만 같았기에, 그 어릴 때부터 '제사를 지내는 시댁'을 탈출 장소로 정한 것이 아닐까?
제사를 지낸다는게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11살 때부터 39살 되는 설까지.
무려 28년 동안 나도 떡집 일을 도우며 장사가 얼마나 힘든지 뼈저리게 깨달았고, 진상 진상 개진상 별의별 손님을 다 만나며 점점 어린이가 아닌, 청소년이 아닌, 화가 많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도심 속의 시골 동네'라고 불릴 정도로 좁은 동네였고, 토박이 어르신들이 매우 많은 유별난 동네였기에 잠시 돕는 그 시간에도 놀라운 상황들이 많이 벌어졌다.
몸이 힘들어 도망가고 싶은 날도 있었고, 형편없이 작은 내 인내심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들도 많았다.
장사를 돕다보니, 어릴 때부터 몰라도 될 것까지 다 알게된 기분이랄까?
그런 일들이 28년동안 켜켜이 쌓였고, 어느새 명절만 다가오면 "아.. 도망가고 싶다."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래서 가고싶었다. 시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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