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 복숭아

파리의 안나 13-1

by Anna

눈을 뜨니 방 안에 나 밖에 없었다. 항상 아침 8시 식사시간에 맞추어 일어나고, 저녁 8시 저녁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오는 이런 일상도 내일모레면 끝이다. 졸린 눈으로 아침을 먹고, 모두 나간 방 안에서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나 여기 오길 잘한 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프랑스 파리에 와도 고쳐지지 않는 내 게으름과 귀차니즘에 잠시 자책하다, 이내 스스로 합리화를 시켰다. 어차피 여기 민박집에 머무는 동안에는 내가 낸 숙박비에 대한 권리가 있고, 이번 주 내내 날씨가 흐리고 비가 왔는데 괜히 무리해서 돌아다니다 아프기라도 하면 타지에서 혼자 더 서럽고 힘들 테니 적당히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지금처럼 지내는 게 최선이라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난 여기서 아프기 싫다. 어쨌든 오늘은 약 10일 만에 다시 샹젤리제에 가기로 했다. 이제 이사를 가면 4 정거장 만에 개선문으로 갈 수 없을 테니까.


나가기 전 마트에 들려서 천도복숭아 한 개와 납작 복숭아 3개를 샀다. 가격표가 출력되는 기계 앞에서 천도복숭아가 불어로 뭐지 싶어 내가 머뭇거리고 있었더니, 바나나를 사던 마담이 나에게 친절히도 사용 방법을 알려주셨다. 어제 사봐서 사용 방법은 알고 있었는데, 친절한 마담 덕에 무사히 천도복숭아의 가격표를 출력할 수 있었다. 이제 파리에서 과일을 자주 사 먹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니까 오늘은 자기 전에 과일을 불어로 정리해 봐야지.

납작 복숭아는 생긴 것만 납작하고 맛은 복숭아랑 똑같았다. 아니 훨씬 더 달다. 매니저 언니와 이모에게 각각 하나씩 주고 나도 하나를 먹고 숙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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