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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솔 Apr 25. 2024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처음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작은 영화를 통해서였다. 

프라하에서 머물던 몇 해전, 나는 시간이 나면 시립 도서관엘 자주 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영화 이야기를 하는 학생 둘을 만났다. 안면이 있는 한국 학생이었고 그의 친구는 체코인이었다. 영화로 제작된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인형극에 애니메이션을 입힌 18분짜리 영화 'TOO LOUD A SOLITUDE(너무 시끄러운 고독)'과 DVD로 제작된 90분짜리 영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고 그들이 말하는 그 영화도 보지 않았지만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 어디서 그 영화를 볼 수 있는지 묻는 나를 휴게실로 데리고 갔다. 그들이 보여준 짧은 영상은 대화도 없었고 자막도 없는 인형극 애니메이션이었다. 마음 한 구석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함이 자리하며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서인지 오히려 궁금증이 컸다. DVD 영화를 보았는지 그들은 그것이 왜 코미디로 분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 후 몇 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왔지만 난 '보후밀 흐라발'이나 'TOO LOUD A SOLITUDE'라는 책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Příliš hlučná samota(너무 시끄러운 고독)

이 책을 만난 것은 산본 중앙도서관에서였다. 누가 읽고 난 뒤 반납 선반에 올려놓은 것을  무심코 집어 들었다. 

책의 제목을 보고 마음이 묘하게 끌렸다. 그다음엔 작가에 대한 소개를 읽고 더 궁금해졌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체코 최고의 작가'라고 칭송을 한 사람이 동시대의 작가 밀란 쿤데라였기 때문이다.

비교적 얇은 책이라 바로 읽기 시작했고 몇 장을 넘기다 보니 프라하 시립도서관에서 본 그 짧은 영상이 생각났다. 바로 그 영화의 원작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공 '한탸'는 폐지 처리장에서 일하는 폐지 압축공이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온전한 나의 러브스토리다'라는 말로 자신의 고독을 담아내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등단하던 무렵의 저자의 나이와 비슷한 한탸, 한탸가 곧 보후밀 흐라발 자신임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10쪽)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본문 첫 장에서부터 마음이 끌릴 이 문장을 그냥 넘기지는 못했을 거다.

한탸는 압축해야 할 고서(古書)의 가치를 알았다. 그는 폐지 압축 전에 마치 미사를 올리듯 ‘독서 의식’을 치렀다. 죽어가는 책들을 향한 경건한 그의 마음이었다. 

정성스러운 이 장면은 프라하 도서관에서 만난 학생들과 보았던 짧은 영화에서 본 기억이 난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그때 본 영상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어 다시 한번 볼 수 있었다. 

버릴 수 없던 책들을 한탸는 방에 쌓아둔다. 침실엔 종교서와 철학책이 2톤이나 쌓여 있다. 그렇게 35년을 축적한 독서력으로, 한탸는 ‘뜻하지 않게’ 체코 프라하 최고의 현자가 되어 있었다. 사회 최하층부 말단 노동자이면서 사상, 문학, 이념, 종교를 전부 섭렵한 현인이었다. 한탸의 독서는 늘 맥주와 함께였다. 수 리터들이 맥주를 마시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죽음의 운명을 앞둔 책을 기쁘게 음미하는 삶, 그것이 한탸의 생활이었다. 맥주에 취한 건지, 책에 취한 건지 모를 정도로 혼몽한 한탸는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어떤 날은 지하실에 젊은 예수가 앉아 있고,  우수에 젖은 노자가 압축통에 몸을 기댔다  

젊은 예수에게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맥주를 단지째 들이켰다. 반면 노자는 홀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무덤을 찾고 있었다. 곤죽으로 짓이겨진 파리떼와 뒤섞인 핏방울이 튀는 와중에도 예수는 그윽한 황홀경에 빠져 있고, 노자는 깊은 우수에 젖어 무심하고도 거만한 자세로 압축통 모서리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예수가 낙관의 소용돌이라면, 노자는 출구 없는 원이다. (52쪽)

한탸는 온갖 오물이 다 묻은 폐지를 비롯해 오래된 고서적에 이르기까지 활자가 입혀진 것은 거의 맨 손으로 만져보게 된다. 그는 열악한 작업 환경이 주는 너저분함 속에서 자기만의 정신적인 진액을 거침없이 흡입한다. 압축기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폐지들 속에는 예수의 말씀과 노자의 도덕경이 있다. 때론 몽상가가 되어 그들을 만나고 비교 비평을 하기도 한다. 

한탸에게 독서못지않은 행복함이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다른 지하실에서 일을 하는 고등교육을 받은 노동자들과의 만남이다. 한탸는 고등교육을 받은 그 친구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친구들이 지하 공장의 억압적인 현실에 맞서 저항하는 것을 보며 그는 지식, 연대, 희망, 인간성, 저항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철학, 역사, 정치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고자 하는 그들이야말로 한타의 가장 소중한 친구들인 셈이다.

한탸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일을 좋아한다. 그리고 행복해한다. 쥐와 파리떼 속에서 그리고 더러운 환경과 맞먹는 소장의 욕설을 견뎌낼 수 있는 것도 근원은 책이 있기 때문이다. 끈적거리며 어둡고 더러운 지하실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압축기와 맞서며 술에 젖어 사는 고독한 인간 한탸. 쇼펜하우어, 헤겔, 고흐, 사르트르와 카뮈... 한탸를 소외된 노동에서 끌어내 주고 친구가 되어준 수많은 활자 속의 주인공들은 깊은 한탸의 고독 속에서 형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그가 맞닥뜨린 장서나 금서들을 통해 공포와 암울의 시대에 행복으로 맞선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중에도 여러 번 한탸의 작업실 주변을 얼쩡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어떤 곳일지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나를 까렐 광장으로 이끄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움찔 몸서리가 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탸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던 그곳 언저리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싶기도 하다. 성당 담벼락 아래 쭈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고독한 폐지 압축공에게서 책 속의 철학자와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과거로의 여행을 하는것 같다.


소설의 전환점은 한탸가 부브니의 거대한 압축기를 대면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현대적 시설을 갖춘 폐지 처리장을 방문하면서부터 한탸는 '미래로의 후퇴(regressus ad futurum)'를 목격하게 된다.

거대한 새로운 압축기는 컨베이어 작업과 그로 인한 여가활동을 꿈꾸는 작업자들에게서 개인주의 문명의 타락상을 본다. 그런 그들에 견주어 한탸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 될 거라는 무기력감에 빠져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고, 이런 일들은 내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한탸는 부브니의 작업장을 빠져나온다. 그리곤 생각한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세계에서 너무도 다른 생각을 하며 작업을 하는 젊은 작업자들을. 그들은 신입 사회주의 노동당원들이었고 한탸처럼 책을 가치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결국 한탸는 사회주의 노동당원인 젊은 작업자들에게 밀려난다. 

장갑을 낀 작업자들의 손에 넘어간 한탸의 압축기는 별 탈 없이 수많은 꾸러미를 생산해 낸다. 평생을 활자로 장식된 종이들에 파묻혀 산 한탸에게는 인쇄소의 백지 꾸러미를 포장하는 다른 업무가 주어진다.

한탸가 소중하게 생각하며 행복해하던 소소한 일상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근원을 향해 전진하던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인간적이지 못한 세상의 일 때문이었다.

그는 사랑했던 자신의 세계에 더 이상 미래가 없음을 비관하며 책들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압축기 속으로 들어간다.
한탸가 택한 '근원으로의 전진(progressus ad originem)'은 독자가 알고 있다. 책을 피신처로 삼은 그의 수많은 독백 속에서 독자는 그가 고독하지만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에겐 영롱하게 기억할 수 있는 수많은 책 속의 철학자와 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이 소설이 오랫동안 금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들이 많다. 소설 속에서 한탸는 오래전 프로이센 왕실 도서관 인장이 찍힌 금장 도서가 폐기 처분되던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다. 1945년 폐망 직전의 나치가 프로이센 왕국의 귀중한 장서를 ‘뚜껑’ 없는 무개화차에 싣고 떠나던 모습이다. 금박을 입힌 책은 당초 프라하 외무성 부속건물에 숨겨지지만 누군가의 발설로 책들은 ‘전리품’으로 규정돼 기차에 실린 채였다. 값을 매길 수조차 없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책들이었다. 그런 귀한 장서가 ‘무게’로 팔려나가는 모습에 그는 절망한다. 검댕과 잉크가 뒤섞인 ‘금빛 물’이 빗물과 눈물에 섞여 무개화차 아래로 줄줄 흘렀다. 

나치의 억압을 상징한다. 나치가 사라진 후 체코를 점령한 소련을 나치와 다를 바 없다고도 묘사한다. 거대한 크기의 자동화 압축기가 그것이다.

위기의 시대를 견뎌낸 작가는 많지만 보후밀 흐라발은 위기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나라를 벗어나지 않았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세계의 혼돈과 소음 속에서 자기 안으로의 침잠을 책이라는 세상을 선택함으로써 행복했던 한탸는 곧 보후밀 흐라발이 아니었을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다음은 번역자의 말을 옮겨본 것이다.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압축기의 리듬을 타고, 한탸의 사소한 일상사는 시적이고도 숭고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그의 사고는 때로 취기와 환각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시종일관 명징함을 잃지 않아서, 우리로 하여금 무리가 아닌 개인에 대해 생각하고 꿈꾸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일깨워 준다. 그처럼 이 작품에는 사랑하는 대상의 죽음(어머니, 외삼촌, 집시 여자. 그리고 책...)을 목격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 그려져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작가 흐라발은  자신의 삶과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그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며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고백했다.


나는 이 글에서 폐지 압축공으로서의 행복했던 한탸의 삶을 주로 삼았다. 한탸의 어릴적 연인인 만차나 외삼촌 그리고 폐지 압축을 하던 어느해 잠시 함께 살았던 집시여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속에서 코믹한 부분들을 굳이 찾는다면 만차와의 인연이다. 일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어찌보면 젊은 한탸에겐 운명이 비껴가는 희비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다. 앞서 프라하 도서관에서 만났던 친구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연인 만차와의 만남은 압축공 한탸에게는 희극일까 비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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