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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솔 May 02. 2024

시를 쓰고 싶은 날에 시를 읽는다

안현미시인의 <기향국수>

대륙에서 돌아온 남자가 국수를 삶는다
국수 그릇은 두 개
국수 그릇은 두 개
사랑은 기어이는 사랑을 못내 지나가야 할 터인데
한 여자를 오랫동안 등지지 못해
여백이 아주 많이 남아 있는 등을 돌리고
대륙에서 돌아온 기향씨가 국수를 삶는다
후루룩후루룩
후루룩후루룩
사랑은 기어이는 사랑을 뜨겁게 넘겨야 할 터인데
한 남자를 오랫동안 등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나도 그냥 그대로 놓아둔 적 있다
어떤 미련과 어떤 불안과 어떤 난처를
오늘밤 펄펄 눈은 나리고
어쩔 수 없이 국수를 삶는 등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서러운 밤이 있다  

                                            <기향국수 전문>


기향씨는 사람 이름이고 '기향국수'라는 간판이 달린 집이 있다고 시인은 어디선가 말한 적이 있다.

'대륙에서 돌아온 남자가 국수를 삶는다'

'대륙에서 돌아온 기향씨가 국수를 삶는다'

 기향씨라는 남자가 국숫집 주인인가? 아니면 국숫집과는 별개의 기향씨 일까? 생각하다가

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지금 진한 국수 국물맛으로 온통 머릿속이 구수해지는걸...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국수를 삶는 등이 있다'를 읽으면서 침통해진다.

 왜 어쩔 수 없이 국수를 삶을까? 생각을 하며 국수를 삶는 남자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과거 연인을 향한 그의 깊은 애정과 그리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일까. 그건 시인의 마음이다.

 다시 읽고 나니 마지막 연의 마지막 행이 서늘하게 와닿았다.

'어쩔 수 없이 서러운 밤이 있다'   


안현미 시인의 삶 속에 존재하는 사랑의 이미지를 보았다. 사랑은 못내 지나가야 하는 것이고 뜨겁게 넘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여자를 등지지 못해 등을 돌리고 국수를 삶는 남자와, 한 남자를 등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놓아둔 것들이 있는 시인, 그 관계를 분석하고 캐내고 싶지는 않다. 국수그릇이 두 개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스스로를  위로받을 수 있었다. 어떤 미련과 어떤 불안과 어떤 난처를 그냥 놓아둔 적이 있는 시인의 마음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해졌다. '어쩔 수 없이 서러운 밤'이 나와 시인의 것이 같을지는 모르지만, 알것 같았다.

인가가 몇 채 없는 산골마을에 들어가 살던 때에 이 시를 처음 읽었다. 어떤 미련과 어떤 불안과 어떤 난처가 덕지덕지 붙어 있던 나를 툴툴 털어버린 후였다. 후루룩후루룩 후루룩후루룩...


시의 궁극적 목표는 자아를 발견하고 치유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은 문학적 글쓰기가 자신에게 갖는 의미를 재발견함으로써 치유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했다. 무의식 안에 들어가 있는 문제를 의식화하는 작업, 그것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 그 자체가 치유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 

안현미 시인 역시 그래서 시를 쓸지도 모른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 때, 시는 말을 건넨다. 시는 불편하고 고된 감정들을 붙들어 탐색하고 변화시킨다. 우리는 자신의 시에 감동하거나 타인의 시에 감동하는 그 순간을 치유로서의 시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나는 안현미 시인의 <기향 국수>를 읽은 후, 흙으로 국수그릇을 두 개나 빚을 수 있었다. 두툼하고 큼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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