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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솔 Nov 09. 2024

스팸 한 조각

그녀는 부재중

그는 손끝을 떨며 편지 봉투를 조심스레 뜯는다. 봉투의 앞면을 자세히 본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어디에 있는 걸까, 얼마나 기다리던 소식인데...

주소도 없는 편지봉투를 뜯고 편지지를 꺼내 펼쳐다. 두장 빼곡한 그녀의 글씨가 낯설게 느껴진다.

신뢰가 얼어붙던 겨울,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잃어갔어. 일과 사랑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지. 네 곁에 있어도 혼자인 것처럼 차가웠던 시간, 서류 같은 대화들이 우리 사이를 메웠어. 결국 우린 서로의 겨울이 되어버리고 말았지. 너는 검은 고양이 같았어.

편지의 시작은 그냥 추웠다. 첫 문장을 읽고 가슴이 시렸다. 뭐지? 

그는 편지를 읽다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걸까 생각한다. 문득 그의 마음속에 그녀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금문교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날, 그녀의 밝은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그 추억에 잠긴 채 그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곤 다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 손 편지를 자주 쓰던 그녀의 익숙한 필체가 어른거리고 시야가 흐릿해진다.  문득 그는 깨끗한 그녀의 빈자리, 그녀의 책상을 바라본다. 그녀가 읽었던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였다. 책 표지엔 마치 '당신은 나를 아세요?'라고 쓰여 있는 것만 같다.

언젠가 넌 공항에서 메시지 하나 남기고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어.
그때 우리 관계는 끝났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사무실에서 내 노트북과 카메라가 사라진 걸 알았을 때, 어이없게도 안도감이 들더라. 네가 남긴 건 부재의 흔적뿐, 공항의 마지막 메시지와 사라진 노트북과 카메라. 역설적인 위안이 되었던 그 빈자리는 기다림이 되고 말았지.

각자의 무게로 휘청이던 우리는 내 사업의 침체기와 네 집안의 그림자 사이에서 서로를 놓쳐갔던 거야. 너도 부모님의 상속 문제로 힘들어했고. 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방관만 했어. 
내 꿈과 열정은 사라지고, 너와의 대화는 점점 더 어려워졌어. 
퇴색된 일상의 벽 앞에서 우리는 점점 낯설어져 갔지만 네가 떠난 후에야 알았어. 기다림이 얼마나 선명한 사랑인지, 부재가 얼마나 깊은 현존인지를. 


그는 잠시 읽기를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타트업 CEO로서의 압박감,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사고, 그리고 누나와의 갈등... 모든 것이 한꺼번에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솔직한 고백에 가슴이 아파왔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가슴을 찔렀다.

난 정말 그녀의 입장을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던 걸까.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책상에 앉아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지난 5년 동안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금문교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을 찍어준 사진은 어디 있을까. 처음 보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일어나 고개를 젓는다.

나도 힘들었잖아, 짜증 나는 일들만 생겼었잖아. 부모님 돌아가시고 누나도 사이가 틀어지고... 미국으로 돌아가느냐 마느냐 한참 갈등할 때였으니까... 나도 모두에게 잘하고 싶었는데,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할 만큼 일이 안 풀렸어... 하긴,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건 너를 탓할 일은 아니지만...


그는 책상 위의 읽다만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래도 그렇지,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지는 건 반칙이야. 전화까지 없애고...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걸 사라진 뒤에야 알다니... 이런 내가 나도 싫다.

그는 그렇게 그녀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며 자신을 책망한다.

그 가을, 유럽에서 돌아온 너에게 나는 어떤 마음으로 돌아왔냐고 물었어. "돌아오면 잘해줄 것 같아서"란 말이 새삼 낯설게 들리더라. 왜 견뎌야 할 때 견디지 못하고 피하는 걸까. 사람이 다 그럴까?
난 그때부터 너를 참, 이기적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는군. 우리가 처음 인연이 닿았던 곳 생각나지?
난 관광 상품 코디네이터일을 했어. 샌프란시스코로 출장을 갔었지. 금문교를 관광하던 날 내 차에 문제가 생겨 난처해할 때 고장 난 차 앞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너. 처음 보는 너의 덕에 내 일정은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었어. 
고마워서 음료수를 대접하는 나에게 너는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 그땐 참 세상이 맑았었나 봐. 넌 나에게 너의 인상이 어떠냐고 쾌활하게 물었어. 그러면서 어떤 화가가 "당신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선한 모습이에요. 한 번 그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실래요?" 했다고 처음 본 나에게 자랑했잖아.
 
다음날 네가 졸업한 학교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해서 만났고, 나의 출장 업무를 반 이상 너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고맙다는 마음이 들어. 하지만 그 후 우리 인연의 시간은 어떠했는지...
시간은 우리를 어떻게 변주해 버린 걸까. 처음 만난 날의 맑음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라면 미래를 같이 그려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때는 미국 생활을 마무리할 때였고 고국으로 돌아가 자신만의 일을 시작하려고 설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를 만난 것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필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 했었다. 그는 마음이 답답할 때면 자동차를 몰고 늘 가는 곳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망이 좋기로 유명한 트윈픽스였다. 시내를 사방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가슴 탁 트이는 곳, 그곳으로 가기 전에 먼저 금문교에 차를 세웠다. 제대로 된 금문교의 전경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녀를 보았다.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아 쩔쩔매고 있는... 

그녀는 트윈픽스를 그녀의 여행상품에 넣을까 말까 생각 중이었고 그는 그녀와 함께 트윈픽스에 갈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일에 도움을 주며 그 며칠간은 즐겁게 휴식을 취했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가마득한 옛 일 같네... 

그는 그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편지를 마저 읽기 시작했다.

그래, 넌 참 선한 얼굴을 가졌지. 늘 선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뒤에 숨은 진짜 모습을 보았어.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취약함을.
코로나19가 모든 것을 뒤흔들었던 그 겨울, 너의 나약함이 선함을 가려버리고 말았어. 

우리는 같은 사무실을 쓰며 서로의 일을 도와가며 지탱했지만 점점 서로에게 원하는 욕심이 커질수록 관계의 의미는 달라져갔지.
한국에서의 첫 발걸음을 나와 함께 했던 너. 어쩌면 나는 받은 은혜를 되돌려주고 싶었는지도 몰라. 본래 가진 것 없던 내가 너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고 내 사업을 시작했으니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거야. 그런데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여행사업은 폐업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어.
하지만 너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아. 너의 일은 버텨야 하는 일이잖아. 그런데 나보다 먼저 주저앉으려 하다니... 너의 그런 모습이 우리를 갈라놓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했어. 

이제 많은 시간이 흘렀어. 아무 사심 없이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직 사무실 정리가 안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알아서 정리해 주길 바라. 어차피 내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없이 떠난 것은 미안해. 나는 나 자신에게 많이 지쳐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어?
밖에서 쓰레기통 엎어지는 소리가 나는군. 새끼 밴 동네 고양이가 또 먹을거리를 찾나 봐. 아무래도 스팸 한 조각 던져줘야 할 것 같아.

안녕.


그는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새끼 밴 동네 고양이가 또 먹을거리를 찾나 봐. 아무래도 스팸 한 조각 던져줘야 할 것 같아.' 그 순간, 그의 뇌리에 퉁, 하고 내리 친 것은 언젠가 통화를 했던 희미한 기억이었다.

"나 출장 갔던 일이 생각보다 잘 돼서 일정보다 빨리 왔어. 잠깐 볼 수 있을까? 사무실인데 나올 수 있어? "

"미안, 엄마 기일이라 거제에 내려왔어, 할 건 없지만 엄마가 좋아하던 곳이라 이때만이라도 와서 며칠 지내다 가거든... 학동이라는 곳이야. 근데 동네 고양이들이 난리네?  나가보면 쓰레기통이 엎어져 있고…."

  "아 그럼, 스팸 한 조각 던져 줘!"


그는 읽던 편지를 주머니에 넣으며 자동차 키를 챙겨 서둘러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린다. "누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선한 얼굴을 가졌다고 말을 한 거지? 가장 멍청한 얼굴이 여기 있는데...

 아!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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