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과 빨간 이모

by Anna Lee

어릴 때 혼나고 슬펐던 기억들이 칭찬받고 인정받았던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마음에 남아 있다.

엄마와 대화 중 어릴 때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는 당신이 잘해 준 것보다 막말한 것만 내가 기억한다며 억울해하신다.

압도적인 상황에서 공포와 무력감을 느낄 때 뇌는 편도체를 활성화시키면서 감정이 고조되고 생존 모드로 전환되며 그 상황은 고스란히 장기기억으로 저장된다. 이것이 아이들이 나쁜 일을 오래 기억하는 이유라고 한다(이주현, 2018, 정신의학신문). 잔잔하고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더 오래 기억하는 것이, 결국 살아남기 위해 우리의 뇌가 본능적으로 취하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엄마는 한 번 폭언으로 열 번 애정표현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셈이다. 좀 억울하실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만 네 살 때쯤이었을 것이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던 동생이 유리로 된 커피병을 들고 걷다가 방바닥에 엎드려 있던 내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 유리병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면서 유리조각 하나가 동생의 왼쪽 눈 위를 찔렀다. 피가 나긴 했지만, 다행히 꿰맬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 엎드려 있었을 뿐인데, 동생이 내 다리 위를 건너가고 있었던 것도 몰랐는데, 동생이 다친 것이 전적으로 나 때문인 양 엄청나게 야단을 맞았다. 누가 보면 내가 유리병을 동생에게 들려주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줄 알았을 것이다.

동생의 눈썹 근처에 아직도 작은 흉터가 남아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나는 종종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그때 네가..."로 시작되는 엄마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엄마는 동생의 흉터만 볼뿐, 내 마음에 남은 흉터는 헤아려 주지 않았다.


동생의 커피병 사건 무렵이었을까. 나는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다.

엄마 아빠가 큰 소리로 다투거나 혼나는 날이면 나는 방의 구석진 곳에서 혼자 손톱을 물어뜯었다. 손톱을 입에 물고 있는 동안에는 마음이 가라앉고 심심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손톱을 물어뜯는 데 열중하게 되어, '손톱 물어뜯기'는 어느새 내게 가장 재미있는 놀이이자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고무 쪽쪽이 같은 존재가 되었다. 조금만 불안하면 나도 모르게 손이 입으로 갔다.

때로는 손톱 가장자리에서 피도 나고 아팠다. 처음엔 더럭 겁이 났지만, 그것도 반복되다 보니 병원에 안 가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처도 며칠만 지나면 금세 아물었고, 손톱도 다시 자라났다. 손톱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찌릿찌릿한 아픔이 오히려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느 날 손톱을 깎아 주려던 아빠에게 내 손을 들키고 말았다.

남은 유년기 시절 내내 손톱 물어뜯는 내 버릇을 고쳐 놓고야 말겠다는 어른들과, 손톱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나와의 사이에 벌어진 투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아빠는 생각날 때마다 내 손톱을 검사하고는 야단을 치셨고, 엄마는 내가 아프면 손톱을 물어뜯기 때문에 병에 걸린 것이라고 하셨다. 감기에 걸려도 배가 아파도 다 손톱을 물어뜯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만약 엄마 아빠가 내가 왜 손톱을 계속 물어뜯는지, 내가 왜 손톱에 의지해 스스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는지 알고 싶어 했다면, 그리고 손톱을 대신할 무언가를 알도록 도와주었다면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한번 시작된 손톱에의 탐닉은 나의 끝없는 호기심과 결탁하여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내가 말을 듣지 않자, 엄마 아빠는 친척들한테까지 내 손톱 물어뜯는 버릇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공조이자 연대였다. 아이 하나 대 어른 열 명쯤이었다. 그랬다, 어른들은 비겁했다.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면 나는 어른들로부터 "어디, 손톱 좀 보자!" 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손톱을 입에 넣으면 손톱 밑에 있는 나쁜 세균을 먹게 된다느니 손톱을 계속 깨물면 여자애 손이 못생겨진다느니 하는 잔소리들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어른들의 관심은 나를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 뿐, 손톱 물어뜯는 습관을 고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뭘 잘못했는지, 손톱을 물어뜯는 게 왜 나쁜 짓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어른들이 내 손톱에 대해 말할 때마다 수치스럽고 창피했다. 혼자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내가 굉장히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 자주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렇게 마음속에 나만의 집을 짓고 틀어박히기 시작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을 고치기 전에는 집에 들어오지 말라는 최후통첩과 함께 나는 문 밖으로 쫓겨났다.

누가 들을까 봐 집 앞 계단에 앉아 소리 죽여 울다가,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며 이제 어떡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이모였다.

예쁘고 다정하며 고운 색깔 옷을 많이 입어서 내가 어릴 때부터 '빨간 이모'라고 부르던 이모였다. '빨갛다'는 말은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쁘다는 표현이었다.

울어서 땟국물이 졌을 얼굴로 띄엄띄엄 하는 내 말을 몇 마디 듣더니, 이모는 다짜고짜 초인종을 누르고는 내 팔을 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언니, 이게 뭐야! 애한테 이러는 법이 어딨어!"

그날 이모가 나를 데리고 들어가면서, 당신의 언니에게 대들며 나를 감싸주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토록 확실하게 내 편을 들어준 어른은 태어나서 빨간 이모가 처음이었다.

부정적인 기억도 오래가지만, 통쾌했던 기억도 오래가나 보다.


그 후 나는 삐죽삐죽한 내 손톱을 보는 게 점점 싫어졌고, 친구들이랑 봉숭아 물을 들일 때 불편해서 차츰 손톱을 물어뜯지 않게 되었다.

몇 해 전 고등학교 교사로 정년을 맞이한 빨간 이모는 지금도 여전히 내 편이다.

제자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며 가끔 사진을 보내주곤 한다. 사진 속 이모의 제자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선생님 옆에서 여학교 때의 풋풋한 미소를 되찾은 듯 보인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꼭 어울리는 사진들이다. 그날 내 편이 돼 주었듯, 이모는 평생 그렇게 많은 학생들의 편이 돼 주었을 것이다.


힘들 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삶에 반전이 일어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