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 Feb 21. 2019

츄파춥스

첫 번째 유실물 

아침에 일어났는데 목이 돌아가지 않는다. 이제는 하다 하다 목까지. 욕이 나오려다가 아침이니까, 아침부터 욕을 뱉진 말자. 가운데 손끝에 힘을 모아 참았다.


에이, 개 썅. 


편의점에 전화를 걸었다. 목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그래서? 못 나온다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네, 네!! 못 나갑니다. 아뇨, 목이 안 돌아가요. 목이 안 돌아가서 손님한테 인사를 못 한다고요. 점주는 계속되는 말에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 그래서? 못 나온다고? 무한 반복된다. 네, 네!!! 앞으로도 영영 못 나가요. 전화를 확 끊어버리고 열 받아서 전화기를 냅다 던져버렸다. 던지고서 아차 싶었는데 다행히 이불 위로 떨어졌다. 아직 할부금이 남아있어 안전한 곳으로 던진 것이다. 그나저나 이게 아닌데 오늘 하루도 제대로 말렸다. 아무 옷이나 대충 입고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이런 날엔 입을 옷도 죄다 빨래통에 들어가 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옷장을 뒤지는데 언제 산 옷인지 모를 후드 티가 양말 더미에 파묻혀있었다. 겨자색인지 똥색인지 알 수 없는 색상의 후드 티였다. 이렇게 촌스러운 색상을 내가 샀다고? OMG. 어느 모임에서 참가 복으로 받았던 옷인가? 알게 뭐람. 병원이 급하다. 주워 입는데 모가지가 아팠다.


바로 선 병원으로 걸어서 갔다. 버스를 타고 지나칠 때마다 저런 병원은 누가 다니나 했었는데 그 누가 내가 될 줄이야. 아침 일찍부터 나왔더니 병원 안은 한산 했다. 접수창구에서 접수하고 진료를 받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진찰을 기다리는 동안, 엑스레이를 먼저 찍어야 한다고 간호사가 말했다. 의자에 앉아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후드 티 주머니 안에 손을 넣자 무언가 만져졌다. 꺼내서 보니 포도 맛 츄파춥스였다. 이건 또 뭔가? 츄파춥스를 만지작거리며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다. 초록색 옷을 입은 방사선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생각났다. 츄파춥스!


호재는 그 얼굴을 하고도 잘 돌아다닌다고 말했다. 그날도 내 얼굴은 팅팅 부어있었다. 여느 때처럼 어젯밤에 라면을 먹고 잤기 때문이라고 뻔뻔하게 말했다. 먹으면 얼굴이 붓는데 왜 매일 밤 라면을 먹고 자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매일 밤마다 울어서 꼴이 이렇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눈빛도 궁금해하는 얼굴도 모두 사양이다. 호재는 내가 그렇다고 말하면 더 묻지 않았다. 호재의 그런 면 때문에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엑스레이를 찍으러 들어서자 방사선사가 안에 뭘 입었느냐고 물었다. 나시를 입었다고 했더니 상의를 탈의하고 안에 있는 하늘색 가운을 입고 나오라고 했다. 엑스레이실 한편에 커튼으로 된 탈의실이 있었다. 안에 들어가 커튼을 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몸을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커튼이 홱 돌아갈 것 같았다. 이렇게 허술한 곳에서 속옷을 벗고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니. 목을 숙일 수 없어서 하늘로 만세를 하고 옷을 벗으려니 커튼이 자꾸만 거슬렸다.


불쑥 커튼이 젖혀졌다. 호재였다. 편의점 앞치마를 서랍에 넣으려다 놀라 주저앉았다. 이런 장난은 싫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매번 똑같다. 킥킥거리며 이번에도 놀랐느냐며 얄밉게 웃는다. 진짜 주먹이 운다, 울어. 서로 원투 펀치를 날리다가 누구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얄미운데 진짜로 때릴 순 없다.


"편의점에 오지 마."

"???"

"앞으론 오지 마."

"진심??"

"장난 아니고 진심이야."

"이유 설명 플리즈."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호재는 나를 보면서 눈을 크게 뜨더니 얼간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웃음이 나오기 전에 말을 먼저 해야 했다.

"사람들이 네가 내 남친인 줄 알아."

"남친 맞는데 무슨 문제?"

"야!!"

"너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동성으로 바꿀 순 없어."

진지한 기색이라곤 어쩜 저렇게 없을까? 어쩌다 이런 인간하고 친구를 맺었는지 나 자신이 후회스러운 순간이었다. 하기야 그랬던 적이 어디 한 두 번인가.

"오늘부로 연락처 삭제할게. 잘 살아."

녀석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보폭을 크게 늘려 빨리 걸었다. 뒤통수 뒤로 녀석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진심??"

몇 발자국 못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방사선사가 고개를 조금만 더 들어보라고 했다. 속으로 내 목이 당신 말처럼 움직일 것 같으면 지금 여기 있겠냐고 소리쳤다. 방사선사가 방에서 나오더니 내 턱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보려고 했다. 차가운 손이 턱에 닿았다. 전혀 안 움직여지세요? 도대체 몇 번을 얘기해야 사람들은 내 말을 믿는 걸까? 짜증 섞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전혀 안 움직이는데요. 방사선사가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그렇게 계세요. 숨 참으시고 하나, 둘, 다 됐습니다. 옷 갈아입으시고 나가셔서 진료실 앞에 앉아 계세요. 커튼을 치자 머릿속에서 계속 같은 말이 맴돌았다. 그냥 그렇게 계세요.



"그럼 그렇게 있던가 평생"


지하철 입구 계단에서 호재가 내 등을 살짝 밀면서 했던 말이다. 그 말과 함께 떠밀리듯 계단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 신천역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계단을 한참 내려가다 위를 쳐다봤는데 계단 위 끄트머리에 호재 옷이 내려오는 사람들 사이로 보였다. 손에 무언가 쥐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실물 종합안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