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뽕과 키높이 깔창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한창 패션에 마음이 쏠려 인터넷 쇼핑으로 옷을 모으며 ‘패션왕’이 되려 애썼다. 옷을 잘 입는 친구들의 스타일을 따라 하고, 연예인 사진을 찾아 비슷한 옷을 주문했다.
그러다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옷이 멋져 보이려면 결국 그 옷을 걸칠 몸이 받쳐줘야 한다는 것. 옷태를 살리는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충분한 키. 둘째, 직각으로 떨어지는 넓은 어깨. 안타깝게도 그 두 가지 모두 내게는 없었다.
그때 남학생들은 대체로 성장기를 지나 키와 골격이 거의 다 자라 있었다. 키 큰 친구들은 이미 180cm를 훌쩍 넘었고, 아버지의 키가 내 키와 비슷한 것을 보니 나도 더 자랄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어깨 역시 골격이 작은 편이라 시간만으로 넓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온라인에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단번에 보완해 주는 물건들이 있었다. 바로 ‘키 높이 깔창’과 ‘어깨 뽕’이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브랜드가 있었다. 이름하여 ‘키작은남자’.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는 이들의 비밀스러운 성지였다. 나는 여러 아이템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깔창은 5cm와 2.5cm가 있었는데, 티가 덜 날 것 같아 2.5cm로 결정했다. 어깨 뽕 티셔츠는 티가 덜 나는 디자인을 찾고 싶었지만, 당시 유행은 몸통은 검은색, 어깨와 팔은 하얀색인 투톤뿐이었다. 결국 구매 버튼을 눌렀다.
문제는 택배였다. 기숙형 학교였기에 모든 상자는 공용 택배실 앞에 그대로 놓였다. 박스만 봐도 ‘누가 무엇을 샀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는 구조였다. ‘키작은남자’에서 주문한 사실이 알려질까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며칠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택배실을 들여다봤다. 마침내 상자를 보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큼직한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상자를 낚아채듯 들고 기숙사 방으로 달려갔다.
포장을 뜯고 어깨 뽕 티셔츠를 입어 보았다. 거울 속의 나는 달라져 있었다. 어깨선이 반듯해지고 옷태가 살아났다. 깔창을 넣은 신발을 신으니 하늘이 조금 더 가까워진 듯했다. 나는 조금 더 어깨를 펴고, 턱을 높이 들었다.
새 무기를 장착한 만큼 새로운 불편도 생겼다. 아무도 내 어깨에 손을 대지 못하게 경계해야 했다. 옷을 갈아입을 때는 옷장 문에 몸을 숨긴 채 몰래 벗었다. 어깨 뽕 셔츠는 빨래통에 넣지 못해 따로 손빨래를 했다. 신발을 벗어야 하는 장소에서는 재빨리 신발을 주워 신발장에 넣었다. 들킬까 봐 마음이 늘 조마조마했다.
그때 나는 왜 그 물건들을 그토록 감추려 했을까.
물건을 숨기는 이유는 대개 둘로 갈린다. 하나는 사회의 눈과 어긋나는 것을 체면 때문에 숨기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어서 드러내지 않는 경우다. 전자는 부끄러움에서, 후자는 애착에서 비롯된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사회의 눈은 여러 층위에서 작동한다. 먼저 나이의 틀이다. 어릴 때 쓰던 애착 인형을 성인이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면, 사회는 ‘아이의 물건’과 ‘어른의 물건’을 구분하는 전제 위에서 곁눈질한다.
다음은 성별의 틀이다. 강인해 보이는 남성이 드레스를 입은 인형을 수집하거나 로맨스 소설을 즐기면, 고정된 ‘남성다움/여성다움’의 이미지가 물건 선택에 개입한다.
마지막으로 생산성의 틀이 있다. 한동안 ‘오타쿠’는 애니메이션에 과몰입해 일상과 관계를 해치는 사람을 지칭하는 부정적 낙인이었다. ‘쓸모없는 취미에 시간과 돈을 쓰는 일’은 비생산적이라는 시선 때문이다. 이런 기준과 눈치의 그물은 사람들의 선택을 오래 조정해 왔다. 이 그물의 영향이 내 이야기 위에서 어떻게 드러났는지, 이제 그 실루엣을 대보려 한다.
내가 깔창과 어깨 뽕을 감췄던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먼저 성별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남자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야 한다는 기준에 나를 맞추고 싶었다. 문제는 그 기준에 이르는 방식까지도 사회가 정해 둔 듯했다. 자연스러운 성장이나 운동 같은 통상적 경로 말이다. 그러나 나는 물건의 힘을 빌려 그 긴 과정을 지름길로 건너뛰었다. 아마 그 지름길이 들킬까 봐, 그래서 내가 빚어 올린 모습이 가볍게 보일까 봐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었다. 그 물건들이 만들어준 자신감과 당당함이 좋았다. 누군가가 알게 되는 순간 그 효과가 농담거리로 희석될까 봐, 혹은 그때의 취약함을 버티게 해준 사적인 감정이 노출될까 봐 망설였다.
다시 돌이켜 보면, 내가 감추려 했던 것은 물건 자체보다도 그 물건이 잠시 세워 준 나의 자세였고, 그 자세가 무너질까 두려운 마음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물건들이 어느새 내 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키가 달라진 것도 아니고, 어깨를 포함한 몸도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몇 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먼저, 커가면서 모든 기대를 충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회의 요구에는 끝이 없다. 이른바 ‘육각형 인간’—여러 역량이 고르게 뛰어난 사람—을 이상으로 삼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그 기대를 따라갈수록 나를 소모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렇게 생각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또 하나는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들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내가 해 나가야 할 일들이 생겼다. 그 과정에서 깔창이나 어깨 뽕보다 나를 더 기분 좋게 하고 더 오래 지탱해 주는 것들이 자연스레 곁에 쌓였다. 그러자 예전의 보정 도구들은 조용히 역할을 마쳤다.
돌아보면 물건은 내 삶의 압축 파일이었다.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내보였는지가, 그때의 내가 세상과 맺은 관계의 모양을 드러냈다. 나는 더 이상 물건으로 나를 높이지 않으려 노력한다. 대신 물건이 가리키던 결핍과 소망을 배우는 일로, 삶의 방식을 바꾸어 간다.
물론, 감추고 싶은 물건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 과거에 숨기고 싶었던 것들을 먼저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감추는 일은 나와 세상을 속이는 행위만은 아니었다. 지키고 싶은 나를 고르는 일이기도 했다. 다만 오래 갈 힘은 겉을 높이는 물건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장치를 쥐던 마음의 태도를 다지는 데서 왔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한 번 떠올려 보길 바란다. 누구에게는 평범하지만, 당신에게만은 유난히 소중해서 쉽게 내놓지 못하는 것. 왜 그것을 감추고 싶은가. 그 물건 속에, 지금 당신의 마음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