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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물건

지갑

by 박동현

결혼을 앞두고 예물로 무엇을 사야 할지 고민하던 때였다. 보통의 경우 신랑 측이 신부 측에게 가방, 목걸이 등의 선물을 하고 신부 측이 신랑 측에게 시계와 같은 선물을 한다.


내 경우, 조금 특이하게도 장인어른, 장모님께서 현금으로 예물을 주셔서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냥 내 돈으로 필요한 것을 사는 것이라면 그리 어려운 고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그냥 내 돈이 아니지 않는가. '예물'이라는 이름을 단 순간,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 되어야 했다. 사랑의 증거이자, 사회적 약속이자, 타인의 시선 앞에 놓일 하나의 표식.


나는 평소 명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평소에도 비싼 물건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는 성격이기도 해서 더더욱 고르는 것이 어려웠다. 보통 많이 산다고 하는 시계를 사야 할지 생각도 해봤는데 원래 사용하던 스마트워치가 있어서 굳이 시계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고민을 많이 했다.

그때 생각이 난 것이 지갑이었다. 고등학교 때 2만 원인가 주고 샀던 지갑을 별생각 없이 거의 10년 가까이 사용했다. 하지만 어느 날 직장 동료들과 카페에 앉아 각자 자리에 앉으며 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순간, 테이블 위에는 구찌, 루이비통, 프라다 등 브랜드 로고 이름이 보였다. 그사이에 아무런 브랜드 로고도 없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빛바랜 내 검은 지갑이 유독 초라해 보였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이참에 지갑을 구매하기로 했다. 유튜브에 '남자 명품 지갑'이라고 검색하니 무슨 계급도가 1위부터 10위까지 브랜드별로 주르륵 나왔다. 1위에는 벨루티라는 브랜드가 있었는데 무슨 1800년대 미국 서부 영화에서 나올법한 디자인의 지갑이 있었다. 그 아래로 고야드, 루이비통 등 다양한 브랜드의 지갑들이 있었다. 브랜드 이름이 곧 서열처럼 나열된 목록 앞에서, 나는 웃음이 나면서도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지갑 하나에도 계급이 있다니.


프라다, 구찌, 에르메스 등의 브랜드를 살펴보면서 예쁜 지갑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대부분 지갑에 대문짝만하게 브랜드 로고가 붙어 있었다. 너무 자랑하는 것 같은 느낌의 지갑들이 대부분이라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만나게 된 브랜드는 몽블랑이었다. 작은 로고, 절제된 디자인,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묵직한 느낌이 있었다. 마치 '힘숨찐'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그 지갑을 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게 내 첫 명품이다."

내 생의 첫 명품 지갑을 산 이후, 지갑을 꺼내 계산하거나 지갑을 테이블에 올려놓을 때마다 작은 고양감이 올라왔다. 마치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지갑 하나가 나를 바꿔놓은 듯했다. 물론 실제로 내가 변한 것은 없었다. 그때 알았다. 사람들은 비싼 물건을 사는 동시에, 비싼 물건을 통해 더 나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지갑 하나로 느낀 내 마음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소스타인 배블런은 이미 100년 전 『유한계급론』에서 이 현상을 '과시적 소비'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단순히 필요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소비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도 『구별짓기』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 음악, 옷차림은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계급과 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며, 결국 다른 계급과 나를 구별 짓는 도구가 된다.


내 지갑 이야기를 여기에 겹쳐 놓으면, 모든 게 명확해진다. 지갑 하나가 단순히 돈을 넣는 기능을 넘어, '나는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표지가 된다. 나의 위치, 나의 취향, 나의 계급. 명품 지갑을 꺼내놓은 순간, 나는 스스로와 타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은 것이다.


하지만 왜 우리는 이런 구별 짓기를 멈추지 못할까? 아마도 그것이 우리에게 안전감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누군가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는 확신, 내가 특별하다는 느낌. 그런 감정들이 불안한 현실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방패막이 같은 역할을 한다.


직장에서 승진하지 못한 날, 월급이 적다고 느껴지는 날, 미래가 불안한 날. 그런 날들에 내 손목의 시계나, 내 가방의 브랜드 로고가 작은 위안을 준다. "적어도 나는 이런 걸 살 수 있는 사람이야." 이런 생각이 마음을 달래준다. 문제는 이런 위안이 일시적이라는 점이다. 더 좋은 걸 가진 사람을 만나면 다시 초라해지고, 더 비싼 걸 사고 싶어진다.


이런 구별 짓기가 개인의 심리적 위안 수준에서 머물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확산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학벌주의, 지역감정, 세대갈등 같은 것들도 결국 구별 짓기의 다른 모습들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라는 감정이 "우리는 그들보다 낫다"로 변하고, 다시 "그들은 우리보다 못하다"로 발전한다.


이런 감정들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어떻게 될까. 역사는 이미 그 답을 보여줬다. 20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우월한 민족"이라는 허상이 어떻게 끔찍한 결과를 낳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개인의 소소한 구별 짓기와 집단 학살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 시작점에는 비슷한 심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소비를 포기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살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그 안에서 어느 정도의 '보여주기'는 피할 수 없다.


중요한 건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 물건을 사는 이유가 정말 필요해서인지, 아니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한 번쯤 물어보는 것. 그리고 내가 가진 것들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완벽할 필요는 없다. 나도 여전히 몽블랑 지갑을 쓸 때 작은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만족감이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우리가 매일 입는 옷, 매일 바르는 화장품, 매일 꺼내는 지갑, 매일 타는 자동차. 그 모든 물건은 나를 드러내고, 동시에 타인과 나를 나눈다. 완전히 '보여주기'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물어볼 수는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 물건을 가지고 있는가? 정말 나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남과 나를 구별짓기 위해서인가.


결국 문제는 '나'다. 내가 사는 물건들, 내가 고르는 소비가 혹시 내 안의 작은 히틀러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건 아닐까. 타인을 낮추어야만 내가 빛날 수 있다는 감각, 나를 우월하게 보이게 만드는 물건에 의지하는 마음. 그것이 쌓이고 쌓여 세상을 분열시키고, 혐오를 만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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