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저
어렸을 때 명절이면 외할머니 집에 놀러 가곤 했다. 그 시절, 외할머니 집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웃음과 소음으로 북적였다. 어른들만 해도 스무 명이 넘었고, 아이들까지 합치면 서른 명이 훌쩍 넘었다.
식사 시간에는 앉을 자리가 모자랐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1차, 2차로 시간을 나누어 밥을 먹었다. 1차로 어른들이 먼저 드시고 나면 식탁에 차려져 있던 그릇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또 다시 음식들이 차려지면 그제야 2차에 아이들이 먹었다.
그런데 신기했던 건, 그렇게 사람이 많았어도 수저가 모자라 본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수저통에는 언제나 빽빽하게 수십 쌍의 수저가 꽂혀 있었다. 족히 마흔쌍쯤은 되었던 것 같다.
수저뿐만이 아니었다. 이불도 장롱 한가득 들어있었다. 멀리서 오는 가족들이 있었기에 방은 물론이고 거실에도 빼곡하게 이불을 깔아서 다 함께 누워 잠을 자곤 했다.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있으면, 코 앞에 사촌의 발이 있었고 옆에서는 이모부가 코를 골았다.
당시에는 그게 당연했다. 가족들의 숫자도 많았을뿐더러 “혹시 누가 올지 모르니까.” 언제든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올 수 있고, 갑자기 누군가 들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늘 여유 있게, 넉넉하게 준비해 두는 것이 집안의 기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은 그 풍경이 달라져 가고 있다. 가족은 줄어들었고, 친구나 친척이 집에 찾아와 식탁을 함께 나누는 일도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여분의 수저나 이불이 필요한 상황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결혼할 때 새로 산 수저 세트는 고작 몇 쌍에 불과하다. 사실 우리 부부가 사용하는 건 두 쌍뿐이다. 나머지는 수저통에 꽂힌 채로 1년에 몇 번 꺼내지 않는다. 할머니 집에 있던 마흔 쌍의 수저는, 세대를 거치며 여섯 쌍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줄어든 수저를 보며, 수저의 종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수저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여분의 수저, 즉 나 외의 사람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자리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본다.
그 변화는 단순히 물건의 숫자가 줄어드는 일이 아니다. 함께 밥을 나누어 먹던 풍경,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 여유를 남겨두던 마음도 함께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어릴 적 할머니 집에서 생활이 항상 편하지만은 않았다. 사람이 많아 밥도 빨리 먹어야 했고, 이모부의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설치는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그 불편함 덕분에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형들을 따라 건물 옥상에서 폭죽놀이를 하며 놀기도 하고, PC방에 함께 놀러가서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며 어울려 노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내가 중요한 만큼, 상대방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던 거 같다.
지금의 사회는 점점 더 ‘나’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효율이 가장 중요해졌고, 남에게 내줄 시간도 아까워서 혼자 먹는 밥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수저통 속 풍경은 그 변화를 은밀히 드러낸다.
사실 수저가 줄어드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수저의 개수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그 수저를 함께 나눌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데 있다.
당신의 수저통에는 몇 쌍의 수저가 있는가? 당신의 수저를 나눌 사람은 몇 명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