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1학년을 무전공으로 입학하여 1년 동안 다양한 개론 수업들을 들으며 전공에 대해 탐색하고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게 했다. 1학년 2학기, 치열한 수강 신청을 뚫고 사회복지학개론 수업을 듣게 되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복지에 대한 이해도가 거의 없었다. 막연하게 봉사활동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이겠지 생각했다.
사회복지학개론 수업을 듣던 어느 날, 교수님께서 일주일 동안 ‘강독회’를 하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참석하라고 하셨다. 사실 처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강독회에 참석하면 보너스 점수를 준다고 하기에 어찌어찌하다가 참여하게 되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 동안 진행되었는데 처음 이틀은 깜빡하고 가지 못했고, 3일째 되는 날 처음으로 강독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특강이 진행되는 강의실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둥그렇게 책상이 세팅되어 있었고, 십여 명 정도가 앉아 삼삼오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혼자 특강을 들으러 온 나는 약간 뻘쭘하게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책상 위에는 몇 장의 프린트물이 놓여 있었다. 프린트물에는 ‘복지요결’이라는 책 제목이 적혀 있었다.
곧이어 특강이 시작되었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선생님께서 교실을 둘러보시더니, 처음 온 사람들이 있으니 복습 차원에서 책의 머리말을 다시 함께 읽자고 하셨다.
“사회사업 바르게 하고 싶습니다. 사회사업 잘하고 싶습니다. 근본 있는 사회사업가이고 싶습니다. 사회사업이 어떤 일이며 무슨 가치가 있는지 의미도 모르고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문제의 근원이 무엇이며 복지의 바탕이 무엇인지 원리도 모르고 개입할 수는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이상과 철학도 없이 달음질할 수는 없습니다. 어찌해야 사회사업 바르게 했다 잘했다 할 것인지 기준도 없이 그저 열심히 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 동안은 남들 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할 수도 있겠으나 오래 하지는 못할 일입니다. 현실이 어렵다고 마냥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근본이 있어야 합니다. 근본을 좇아 행하고 근본으로써 성찰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복지요결』은 사회사업을 근본으로부터 이야기하는 사회사업 원론입니다.”
도대체 이 책이 뭔데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나 싶었다. 이름도 무슨 중고 책방에서 발견할 법한 옛날 책 이름 같았다.
“달리기 시합을 할 때 목표 지점이 어디인지 모르고 달렸다고 생각해 봅시다. 100m를 달려갔다 해도 그 방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달렸다면, 그게 앞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회복지, 사회사업을 하면서도 아무리 열심히 했다고 해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세워두지 않으면 오히려 뒷걸음질 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후 선생님께서 예시로 들어주신 이야기를 들으며, 남을 돕는 일에도 철학과 방향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단순하게 생각했던 ‘도움을 준다’는 행위도 제대로 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사회사업을 하는 것은 사람을 돕는 것인데, 사람다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도움을 주면 오히려 그 도움은 그 사람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겨울철에 봉사활동으로 김치 담기 활동을 많이 하는데, 보통 기관들은 어떻게 할까요? 봉사자들 모집하고 사회복지사들이 모여 힘들게 김치를 만들고 독거노인들께 가져다드립니다. 받는 어르신들은 어떨까요? 고마운 마음도 있지만, 매번 받기만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여기저기 기관에서 김장 김치를 가져다주니 ‘여기서 만들어주는 김치는 맵다, 짜다, 싱겁다’ 불평하기도 합니다. 봉사자와 기관은 대단해 보이고, 받는 독거노인들은 초라한 모습이 되기 쉽습니다. 어르신들이 어르신 노릇 하기도 어려워지고, 점점 더 아이 같은 모습이 됩니다. 같은 동네 어떤 할머니는 받고, 어떤 할머니는 못 받으면 좋던 사이에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뜨끔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능이 끝나고 학교에서 김장 김치를 담그는 행사를 한 적이 있었다. 수천 포기의 김치를 학생들이 담가 주변 지역 독거노인분들께 전달하는 행사였다. 나름 열심히 했고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 행사의 주인공은 우리, 학생들이었다. 사실 김치를 담그면서도 우리끼리 놀고, 맛보고 했지 그 음식을 받으실 분들에 대한 깊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물론 우리가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봉사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했고, 물질적으로 도움을 드린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도와주는 마음을 가지고 돕는다고 해서 모두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걸언(乞言)’, 즉 당사자와 지역사회에 인사하고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하고 감사하는 일을 하지 않고 돕는다면, 오히려 도움을 받는 사람은 이름만 사람일 뿐 그저 주는 대로 받거나 시키는 대로 하기 쉬워진다고 하셨다. 부족해도 서로 돕고 살아가던 지역사회가 힘을 잃게 된다고도 하셨다.
충격이었다. 그냥 돕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구나. 사람과 사회에 대해 공부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 사람의 존엄성과 사회적 관계를 망치게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어진 강독회에 참석하면서 알게 되었다. 사회복지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봉사활동을 넘어서, 어떻게 사람을 사람답게 돕고 사회를 사회답게 만들 것인가를 공부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새로운 세계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이 학문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한 권의 책을 통해 사회복지를 전공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언제나 우연처럼 다가온 물건, 사람, 시간이 모여 만들어진다. 그 순간은 별것 아닌 듯 스쳐 지나가지만,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면 분명히 그때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강독회에서 만난 한 권의 책도 그렇다. 단순히 주어진 프린트물을 읽었던 작은 경험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사람을 돕는다는 것’의 무게를 처음으로 느꼈고, 그 무게가 지금까지 내 삶의 방향을 이끌어 주고 있다.
삶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스며든 작은 경험이 내 안에 씨앗처럼 자리 잡고, 시간이 흐르며 꽃을 피우듯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사실은, 그 책이 모든 사람들을 바꾸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저 보너스 점수로 끝나고 지나가는 해프닝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또 깨닫는 것은, 주어진 순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내 의지로 그 우연을 받아들여 자기 삶으로 만들어내는 것의 중요성이다.
당신을 바꾼 물건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물건들을 곁에 두고 살아간다. 어떤 것은 별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가고, 또 어떤 것은 오래도록 곁에 머물며 우리의 시간을 함께 채운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어떤 물건은 우리의 생각을 흔들고 삶의 궤적을 바꿔놓는다. 그것이 책일 수도 있고, 오래된 편지나 누군가의 선물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순간에 내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내 삶 속으로 끌어안느냐이다. 인생은 그렇게 우연과 선택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앞으로도 나의 앞길 어딘가에는 또 다른 물건, 또 다른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그리고 그 순간이 오면, 나는 다시 한 번 삶을 새롭게 써 내려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