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대학을 졸업하던 봄이었다. 봄이 겨우 겨울을 밀어내던 시기, 나는 봄을 맞이하지 못한 채 가족과 여자 친구를 두고 빡빡머리가 되어 진주의 공군훈련소로 향해야 했다.
진주 공군훈련소 안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아니, 내 마음에는 오히려 겨울이 거꾸로 다가오는 듯했다. 입대 후 약 일주일 동안의 신체검사와 행정 처리, 이른바 가입소 기간을 마치자,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가입소 기간을 종료하는 사이렌과 함께 방송을 통해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훈련을 받기 위한 준비가 되어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 있는 모두는 지금부터 학사 142기 정식 후보생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말.
“따라서 지금부터 경어를 폐지한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복도 양 끝에서 훈육관들이 튀어나왔다. “야! 소지품 들고 다 나와!” “너 엎드려!” 그렇게 ‘특별내무관리기간(특내기간)’이 시작되었다. 사회인으로서의 습성을 버리고 군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집중 훈련 기간이었다. 쉽게 말해, 우리의 신분은 ‘인간’에서 ‘개, 혹은 그 이하’로 바뀌었다.
그 기간에는 서 있는 순간보다 엎드려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빨간 모자를 쓴 훈육관들은 하루 종일 고함을 지르며 우리를 몰아붙였다. 예를 들어, 복도를 걷다가 방송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차렷 자세로 정면을 봐야 하는데, 계단에서 훈육관이 갑자기 튀어나와 나도 모르게 그쪽을 보면 “야, 움직였지. 엎드려! 팔굽혀펴기 100개!”를 외쳤다. 2주 동안 나는 인간을 가장 빨리 길들이는 방법이 공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웠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흘러간 3주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만화 드래곤볼의 ‘정신과 시간의 방’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바로 그곳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버티게 해준 게 있었다. 바로 2주간의 특내기간이 끝나면 받게 될 가족과 여자 친구, 친구들의 편지였다. 그 편지는 너무나 간절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간절했던 것은 당연 여자 친구의 편지였다.
특내기간을 마친 어느 날 저녁, 씻고 신변 정리를 하던 시간에 훈육관이 복도 끝에서 박스를 들고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편지를 나눠주는 것이었다. 빡빡머리 들은 각자 방문에 귀를 대고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누군가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환호와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편지를 받은 이는 기쁨에 소리를 질렀고, 받지 못한 이는 비참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야 했다.
나도 다행히 이름이 불려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그 안에는 부모님의 편지만 들어 있었다. 가장 간절히 기다리던 여자 친구의 편지는 없었다. 그 순간, 간신히 나를 붙잡고 있던 줄이 툭 끊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생각했다. 간절함에는 내가 맞이하기 싫은 상황에 대한 두려움도 존재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지금의 아내가 된 당시 여자 친구는 입대 직후부터 여러 통의 편지를 썼다. 다만 입대 후 보낸 편지들을 특내기간이 끝나면 한 번에 전달되는 줄 모르고 모아 두었다가 특내가 끝나고 나서 나중에 한꺼번에 보낸 것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것들을 간절히 원한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는 합격 통지서를, 추운 겨울에는 담요와 난방기구를, 휴대전화 배터리가 1% 남았을 때는 충전기를. 사람마다 간절한 물건은 다르지만, 그 이면에는 늘 두려움이 있다. 잊힐까 봐, 실패할까 봐, 버티지 못할까 봐. 그래서 그 간절한 물건에는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들어있다.
편지를 기다리던 마음의 바닥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녀가 더 이상 나를 기다려주지 않으면 어쩌나, 내 자리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지워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특내 기간이 끝난 뒤, 훈련소에 있었던 3개월의 기간 동안 매일 밤에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들어온 편지들을 나누어 주는 시간이 있었다. 내 이름이 불려 편지를 확인하는 날에는 기쁨으로 잠을 청했고, 내 이름이 불리지 않는 날에는 무거운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그렇게 편지 한 장에 살기도, 죽기도 했다.
편지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이 여전히 나에게 머물러 있다는 증거였고, 우리가 이어져 있다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그런 간절함 덕분에, 한편으로 나는 매일 이어지는 고된 훈련을 버텨낼 수 있었다.
간절히 바라는 물건은 결국 그 물건 자체 때문이 아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그것을 견디게 하는 희망 때문이다. 편지를 기다리던 나는 종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길 그녀의 마음을 원했다. 추운 겨울 담요를 원하는 이는 따뜻함을, 수험표를 붙잡는 학생은 미래의 가능성을 바란다. 물건은 단지 매개일 뿐,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언제나 그 너머에 있다.
그래서 간절함은 역설적이다. 결핍과 두려움을 드러내기에 초라해지지만, 그 두려움을 희망으로 감싸 안기에 또 살아갈 힘이 된다. 어쩌면 간절함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솔직한 얼굴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에게도 그런 물건이 있지 않은가.
한때는 목숨처럼 간절했지만, 지금은 서랍 어딘가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물건. 혹은 여전히 마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물건. 그 물건을 떠올린다면, 당신이 두려워했던 순간과 그 두려움을 희망으로 견뎌냈던 기억이 함께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