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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Sep 13. 2017

정확한 사랑의 실험, 폴리아모리

"어디냐"고 물을 수 없는 연인을 만나다.


네가 좋아. 그리고 다른 사람도 좋아해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사귄 지 한 달도 안 된 어느 날이었다. “널 좋아해. 그런데 다른 사람도 좋아졌어. 너랑 그 애, 둘 다 만나면 안 될까?” 너무 놀라 눈물도 나지 않았다. ‘폴리아모리’(다자간 사랑 또는 다자연애), 그 애는 내게 그 단어를 처음 알려준 사람이었다.


나는 반강제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그 애는 내가 다자연애 제안을 거절하면, 나를 포함한 두 사람 모두와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혼자 남게 될 거야.” 그 말을 하며 그는 서럽게 울었다. 나는 연민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웠다. ‘공개적으로 바람을 피우겠다는 건가?’


유체 이탈된 ‘멘탈’을 간신히 부여잡고 다자연애의 룰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서로를 독점하지 않는 열린 관계, 각자의 다른 연애에 간섭하지 않기.” 그게 규칙이라고 했다. 단호한 표정으로 그 애는 내게 말했다. “나는 내 욕망에 충실하고 싶어. 그걸 네가 존중해줬으면 좋겠어.” 이해는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적인 시작 이후엔 감정적인 상황만 남았다


출발은 산뜻했다. 우리는 보통의 연인들처럼 시간을 보냈다. 마음이 일렁일 때면, 이성적으로 납득하기 위해 애썼다. ‘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단 여러 사람과 열린 관계를 맺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몰라.’ 속으로 수십 번 주문을 걸었다. 때로 그 사실을 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틈은 쉽게 생겼고 빠르게 벌어졌다.


어느 날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별 생각 없이 물었다. “내일은 뭐해?” “아, 나 K랑 종로에 새로 생긴 맛집 가기로 했어.” K는 그의 또 다른 연인이었다. 깜빡 잊고 있던 내 연애의 다른 한 축이 실체를 드러내자 내 허약한 사랑의 축은 통째로 흔들렸다. 데이트를 마친 뒤부터 그를 다시 만나기까지의 시간은 악몽이 됐다.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가진 모든 상상력이 극대화됐다.


늦어지는 답장 문자, 받지 않는 전화, 함께 있을 때 들었던 말 한마디. 사소한 재료들이 내 상상력을 만나 임성한 작가의 뺨을 후려칠 만한 드라마 대본을 완성시켰다. 상황과 상상력이 쌓아올린 불안 뒤에는 잔뜩 몸을 부풀린 분노와 자기연민이 꼬리를 물었다. 안 먹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마음이 뒤엉켰다. 대안적 연애관이니, 진정한 인간의 본성이라느니, 그 애가 조곤조곤 설명했던 말도 다 ‘개소리’ 같았다. 따지고 싶었다. “이렇게 불행한데, 이런 연애가 어떻게 ‘본성’일 수 있냐”고.



끝은 비참하고 간결했다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싸늘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러지 말고 집에 가서 쉬어. 정신 있을 때 이야기하든가.” 그는 투정을 받아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억울함과 서운함이 엉켜 눈물이 났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아내의 다자연애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술 마시고 깽판을 놓던 김주혁을 안아준 ‘폴리아모리스트’(다자연애주의자) 손예진은 판타지였다. 학교 앞 주점을 서성이다 비참한 마음으로 귀가했다.


관계는 빠르게 식었다. 만나지 않을 때는 연락하지 않았다. “어디냐”고 묻을 수도 없었다. “K랑 같이 있어.” 그 말을 들으면 일어날 분노와 슬픔, 그 모든 감정이 무서웠다. 우리는 지쳤고, 관계는 자연스럽게 끝났다. 한 친구는 나를 위로했다. “감당 못할 거면 애초에 시작을 말았어야 했어.” 맞는 말이었다. 나는 다자연애에 맞지 않는 인간이었고, 그걸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주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하게 해주시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의 말이다. 


짧지만 쓰렸던 다자연애를 끝내고 나서, 나는 기도문에 문장 하나를 덧붙였다.


 “그리고 계약할 땐 언제나 계약 조건을 면밀히 살피고 이해하는 꼼꼼함을 갖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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