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남편이 어디 있겠어

by 안나

남편의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렇게 일상이 되어 버릴 줄 예상하지 못했다.

시아버님이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긴 했으니 어쩌면 가정교육의 당연한 결과물인지도 모르겠다.

손주 육아를 하게 되면서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아기 보느라 힘들지요?”

그럴 때마다 힘차게 외친다.

“아니에요. 설거지는 남편이 다 해 줘요”

결국 나도 남편 자랑하는 아내가 되었으니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나 보다.

남편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 있게 되면 늘 ‘빈익빈 부익부 貧益貧 富益富’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남편 흉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이 죄다 남편 칭찬이라는 화살을 장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멸치 내장과 마늘 껍데기까지 까주고, 게다가 술도 안 마신다는 한 지인의 남편은 의사이기까지 했다. 그런 남편을 당연하게 여기는 아내에게 나는 “ 남편이라는 청정지역에 사는 줄 아세요.”라고 화살을 날렸다.

살림살이 전반에 남편의 도움을 수시로 받고 살아온 자매들을 보면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건강한 몸을 과시하고 있었다. 키가 170에 가까운 동서도 양말 손빨래하는 시동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체격은 말할 것도 없고 체력 또한 바닥인 내가 여태 독박 살림을 해 오며 ‘모두 나 같거니’ 했던 것이 ‘빈익빈 부익부’란 생각이 들게 한 것이다.


결혼했던 그 해, 처가 말뚝에 절이라도 한다는 신혼 때 몸살감기로 남편에게 설거지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조금 있다, 조금 있다’ 미루던 남편이 급기야는 ‘용돈 오천 원을 줄 테니 당신이 내일 하면 안 되겠냐’고 제안을 했다. 32년 전의 일이니 적지 않은 돈이었나 보다. 내가 벌떡 일어나 설거지를 해 버렸으니.


이 어리석은 일을 시어머니에게 이야기했더니 금세 눈 코 입에 웃음이 번졌다. "그렇게 여자는 알뜰해야 한다."라고 했는데 거기서 왜 알뜰이란 단어가 나오는지 고개가 갸우뚱 해졌다.

금쪽같은 당신 아들이 손에 물을 묻히지 않은 것이니 알뜰과는 관련이 없겠으나 ‘남편 주머니에서 그렇게 살림밑천을 끄집어내는 것이 알뜰한 며느리‘라는 설명으로 들렸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남편보다는 딸아이의 설거지 도움을 간혹 받곤 했다. 그런데 딸아이가 남편을 닮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체험했는데 남편의 설거지 제안을 응대하는 고등학생 딸아이의 모습을 통해서다.


그날 내가 남편에게 부탁한 설거지는 핑퐁 게임하듯 둘 사이에서 오가고 있었다.

“딸, 아빠가 용돈 줄 테니까 설거지 좀 부탁하자”

딸아이는 만사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용돈 얼마요..”

“만원”

“안 할래요..”

그럼.. 이만 원”

“글쎄.. 요”

마지막이다. 3만 원”

여기까지 듣던 내가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내가 할게요. 내가”


설거지하며 생각했다.

오천 원에서 삼만 원까지 설거지 값을 올려났으니 보통 인플레가 아니다’

삼만 원을 내주는 남편은 뭔가 개운치 않은 표정이다. 무한대로 올라갔던 설거지 비용은 딸이라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인플레였으니까. 어찌 됐거나 설거지에 관해선 어쩐지 남편의 손바닥 안에 들어 있는 같다.


그런데 요즘 원 없이 남편의 설거지하는 모습을 본다. 딸의 집을 드나들면서이다. 나와 함께 육아를 돕게 된 남편이 자청한 일이 설거지였다. 덕분에 독박 살림을 했어도 아직도 초단 주부 인양 야물지 못한 나는 남편 앞에서 제법 큰소리친다.

“그렇게 그릇을 설렁설렁 헹구면 세제로 배가 부르게 돼요”라고.


그 큰 소리 앞에서도 자신감 백 프로 남편은 초 긍정 한마디를 날린다.

“나 같은 남편이 어디 있겠어(이렇게 설거지해주는 남편이 어디 있으려고).”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이다.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늘 하시던 “나 같은 시어머니가 어디 있겠냐”는 소리의 후렴이다. 역시 가정교육의 힘이다.


이제는 시어머니의 말이 시어머니의 마음으로 읽히는 나이가 되고 보니 그저 남편의 초 긍정 에너지에 힘을 실어 주는 수밖에 없다. 고춧가루가 그대로 보이고 채 닦이지 않은 기름이 손에 묻어나도 조개처럼 이를 다물고 마음속으로만 외친다. “나 같은 아내가 어디 있겠어요”라고.



사진 출처: [MV]2021 월간 윤종신 Repair 5월호 - 뒷모습

keyword
이전 07화당신에게 내어 줄 시간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