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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Apr 07. 2022

기린반 엄마들은 어디 갔을까?

김밥과 벚꽃

달랑 달랑 거리는 두 다리가 보인다.

아들은 아까부터 층계참에 앉아 두 다리만 흔들고 있다.

점심을 먹고 났는데 막상 할 일이 없었다. 아침에 부지런히 준비해온 김밥과 과일, 과자까지 먹었는데도 시간은 너무 더디 갔다. 한 차에 타고 온 기린 반 엄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애초에 엄마들을 사귀지 않았으니 이런 결과는 당연한 거였다. 남편의 직장관계로 지방 소도시로 이사 온 나는 그 간 미루던 수술을 하고 휴양 차 집에 칩거해 있다시피 했다. 성당에 다니는 게 사회생활의 전부였다.


둘째였던 아들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원장의 호출이 있었다. 아이에 대한 그간의 양육보고서를 내라는 거였다. 다섯 살 아들이 삐죽이 웃기만 하고 말을 안 한다는 이유였다.


말은 좀 늦을 수도 있는 것이고 삐죽이라도 웃는 것이 우는 것보다야 긍정적이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성이 좀 부족하다는 소리로 들었다. 후에 원장의 큰 딸이 자폐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원장의 양육보고서 요구를 이해 할 수 있었다.


유치원 봄 소풍날이었다. 소풍지는 도내에서 벚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한 대학 캠퍼스였다. 소풍은 점심을 먹고 각자 자유 시간을 보낸 후 정해진 시간에 집결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차안에서는 아들과 나란히 앉아 갔으니 아는 학부모가 없다는 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막상 차에서 내리자 엄마들은 끼리끼리 어디론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캠퍼스 안에는 아들과 나 둘만 남은 거 같았다.


아들과 단 둘이 김밥을 먹는데 봄바람에 벚꽃은 어찌나 흩날리는지 깔아놓은 깔판 위로 계속 내려와 앉았다. 색색의 양념으로 맛을 낸 김밥과 연 분홍의 꽃잎은 서로 어우러져 봄날의 풍경을 맘껏 드러냈다. 더불어 우리 모자처럼 외롭게 보이기도 했다. 김밥을 먹은 후 오후 햇살을 피해 그늘 진 대학건물 층계에 앉아 흩날리는 꽃잎을 막연히 바라보았다. 말이 적은 아들아이가 다리만 달랑거리고 있을 때 원장의 말이 떠올랐다. ‘삐죽이 웃기만 하고 말이 적다는 것’은 아들만이 아니라 내 문제, 곧 내 관계성의 문제라는 것을.


누구나 하는, 또래 엄마들과 만나 남편 흉도 보고. 살림정보도 나누고 아이들 생일잔치도 나누는 평범한 그 무엇에서 나는 좀 멀리 있었다. 더군다나 친구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아들의 생일은 2월 봄 방학 중에 있어 누구를 초대하기에도 어려운 시기였다. 엄마로서의 태만함이 부른 결과들이 김밥위에 외로이 내려앉는 벚꽃 잎으로 보였다. 그 날의 나는 당황했고 아들도, 김밥도, 벚꽃도 외로워 보였다.


지금도 김밥을 싸면 그 날의 벚꽃과 김밥이 떠오른다. 이제 김밥은 나에게는 부족한 사회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김밥은 1인분의 요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밥을 쌀 때면 6컵의 쌀을 씻는다. 6인분의 밥을 하면 10줄의 김밥을 만들 수 있다. 이 중 6줄은 가족의 몫이고 나머지 4줄, 2인분의 김밥은 그 날 생각나는 사람들의 몫이다. 어묵탕이 잘 됐다 싶으면 김밥에 덧붙여 배달한다. 솜씨가 있든 말든 그 날 함께 먹을 사람이 없어 외로웠던 김밥에 대한 나의 예의이다.


얼마 전 생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아들은 어린 시절 생일에 대한 기억을 소급했다. “그 날 생일잔치 끝 난 뒤에 모두 오락실에 데려간다 해서 애들이 진짜 많이 왔었어요.” 내 기억에는 없는 어느 생일에 대한 진실은 아들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은 엄마로서의 최선이었을까? 유난히 행복하게 웃는 고깔모자를 쓴 아들의 사진이 그 생일의 사진일 거라고 확신해 본다.


말이 없고 삐죽이 웃기만 했던 아들은 매일 전화로 내 안부를 묻는다. 서른 살의 아들에게 이제는 수다를 걱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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