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 6. 여행길이니 고생길이니, 펫부리를 넘어서
아가야, 어린이, 부르는 내 목소리에 어쩔 수 없는 물기와 떨림이 실렸다. 그 때, 동동, 발을 구르고 있던 단발 불꽃 미인이 내게 큰 손짓을.
"룩 싸오 콩 쿤(YOUR DAUGHTER) 뜨롱 난(OVER THERE)!"
언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끝에, 출발을 하기 위해 이미 플랫폼을 벗어난 롯뚜 앞에서 온갖 짐을 들고 끌고, 내 배낭과 제 배낭까지 앞 뒤로 둘러 멘 연짱이가 서 있었다!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아이 혼자서 얼마나 애가 탔을까.
"엄마 편의점 간 지 5분도 안 되어서 단발 불꽃 미인 언니가 오더니 지금 롯뚜를 타라고 했어. 그래서 내가 'NOW?'하고 물어봤더니, 바로 타래. 타라는데 타야지. 엄마가 안 와서 혹시나 몰라 짐은 안 실었어."
"에고, 아가야, 엄마가 안 와서 얼마나 애가 탔을까. 미안해."
"엄마가 왜 미안해. 원래 그 다음 번 롯뚜를 타기로 되어 있었잖아. 엄마가 늦게 오거나 놀다 온 것도 아니고, 샌드위치하고 음료수 사느라 그런 건데."
연짱이는 땀에 젖은 얼굴로 편의점에서 사 온 탄산을 단숨에 꿀꺽꿀꺽, 마셨다. 다 큰 연짱이의 얼굴 위로 아란-포이펫 국경을 넘던 10살 연짱이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혼자서 얼마나 애가 탔겠나. 11시간 오버나잇 버스 탔지, 빛도 없는 새벽 낯선 곳에서 무거운 캐리어 끌고 한 시간 남짓 헤맸지, 거기다 롯뚜까지. 미안하다, 어린이.
우리가 좁은 롯뚜 좌석에 앉아 졸다 깨다 하는 사이, 롯뚜 기사는 가뜩이나 비좁은 롯뚜에 사람을 구겨 넣다시피하며 방콕 곳곳에 멈춰 서서 승객을 태웠고, 그 와중에 단발 불꽃 미인은 콘 까올리(KOREAN) 두 사람 제대로 내려주라고 펫부리 가는 내내 기사에게 전화를 하여 우리를 챙겼다. 언니는 생전 처음 보는 두 외국인과의 'TAKE CARE YOU'의 약속을 지키려 애쓰고 있었다.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롯뚜 기사가 빌런이었다. 좁은 롯뚜에 짐짝처럼 실려 2시간 반 쯤 왔을까. 문득, 기사가 내리더니 짐을 막 내팽개치듯 내리는데, 자세히 보니 우리 짐이었다. 그러고는 '카오 왕' 주변이냐고 묻기도 전에 붕, 가버린다. 연짱이 1차 분노.
"롯뚜 아저씨 미친 거야? 여기는 어디야? 누가 봐도 허허벌판이고, 누가 봐도 대중교통으로 올 수 없는 곳이잖아. 이게 뭐야."
잡히겠니, 자포자기 회의적이던 내 예상을 순식간에 뒤집고 그랩이 잡혔다. 이 때 얼른 알아차렸어야 했다. 펫부리는 지금까지 다녔던 어떤 도시보다 규모가 큰 도시이고, 따라서 내가 원하는 도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을.
펫부리 그랩 기사는 언니였다. 언니는 무거운 우리 짐을 능숙하게 싣고, 펫부리 숙소로 향하였는데, 이 역시 최악의 선택이었다. 숙소는 큰 도로 소음과 옆 집 오토바이 렌탈샵 소음이 상상초월이었고, 무엇보다 여행자에게 필수적인 스팟이 모여 있는 메인 거리와도 상당히 멀었다. 연짱이는 가려는 그랩 언니를 붙잡고, 숙소가 너무 시끄러우니 원래의 1순위 숙소로 가자고. 하지만 이 언니 조차 가자는 데로 가지 않고, 펫부리는 와불이 유명하고, 이곳은 이런 숙소가 있고, 하며 이리 저리 다른 길로 갔다. 분노 게이지 슬슬 상승한 연짱이는 언니에게 단호히, 1순위 숙소로 가자고. 그래도 그랩 언니는 순한 사람이어서 썽태우 두 사람 요금 정도만 받았다. 고마웠다.
숙소 리셉션은 비어 있었다. 벨을 누르니 한참 만에 매니저 오빠가 나왔다.
"예약하고 오셨어요?"
"아니오."
"오늘은 토요일이어서 만실이예요."
그러니까 예약을 하라고 했잖아, 연짱이는 분노하였고, 나는 절망하였다.
"우리 호텔은 객실이 열 개 뿐이고, 연초인데다 주말이어서 풀 북은 어쩔 수 없어요. 대신 다른 호텔을 연계해 드릴까요?"
그가 연계해준다는 다른 호텔은 그랩 언니가 이리로 오면서 보여주었던 숙소였다. 매니저 오빠는 지금은 이른 시간이어서 체크인을 할 수 없지만, 커피와 간단한 스낵이 제공될테니 잠깐 기다리면 될 거라고. 생전 처음 본 우리에게 도움을 준 오빠가 고마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숙소 역시 처음 들렀던 숙소처럼 여행자에게 필수적인 스팟이 모여 있는 메인 거리와 상당히 떨어져 있었고, 현재의 숙소에서 캐리어를 끌고 가기에도 먼 곳이었다. 말그대로 24시간 생 고생을 한 연짱이는 대노 상태. 아이는 잠깐 숨을 고르고는 내게 물었다.
"엄마, 펫부리에 왜 왔어? 여기 특별한 것이 있어서 온 거야? 여기 온 목적이 뭐야?"
"글쎄. 주말 특수로 분주한 관광지가 아니어서, 숙소도 거리도 한가롭고 여유로울 줄 알았어. 무엇보다 익숙하지 않은 어촌 마을에서 열흘이나 체류하다 귀국하게 되는 게 싫어서, 정도의 이유가 전부야. 남부나 중부 해안 마을은 북부나 중부 산골 마을에 비해 숙박비 포함 물가가 훨씬 비싸기도 하고."
일단 그 숙소에서 캐리어를 끌고 큰 도로로 나왔는데, 펫부리 오전 햇살은 충분히 뜨거웠고, 길 위는 지열로 이미 지글거리고 있었다. 북부와 달라도 너무 다른 기후였다. 더위에 취약한데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축적되어 연짱이 극대노.
"엄마, 나 펫부리 너무 싫어. 당장 여기서 벗어나자."
무능력하고 상황 판단력 제로인 엄마 탓이지, 펫부리가 무슨 죄가 있겠니.
도착한 펫부리 기차역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회 먼지가 사방에서 풀풀, 날렸고, 공사 부자재로 역사 안팎은 어수선하기 그지 없었다.
"엄마, 일단 여기 앉아 봐."
"엥? 이 먼지 구덩이에 앉으라고?"
"엄마, 우리 24시간 넘도록 씻지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상태에서 땀 엄청 흘리고 다녔잖아. 더 더러울 것도 없으니까, 앉아 봐. 펫부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도시야. 지금까지 다닌 도시들 중 가장 규모 크고 분주한 도시라고. 엄마도 나도 한 번도 태국 남부에 가 본 적 없잖아. 이 번 기회에 한 번 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연짱이는 바로 다른 곳으로의 이동을 택하였다.
"다음 도시 자료 꺼내 봐, 엄마. 여기가 1순위 숙소야? 일단 전화해서 객실 여부부터 확인해 보자."
여러 번 전화를 해보았지만, 숙소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치고 낙망하여 나도 연짱이도 말없이 앉아만 있던 그 때.
"호텔인데요, 부재 중 전화가 와서요."
두 말 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숙소를 예약하고, 쁘라쭈압 행 기차표를 구매하였다. 지금까지 너무 고생을 했던 터라 쁘라쭈압까지는 시원하고 편하게 가려고 에어컨 2등석을 물어보니 368밧. 팬 3등석은 31밧. 가격 차이 실화니.
"어떡하지, 어린이?"
"어떡하긴. 당연히 31밧 팬 좌석이지."
"세 시간 동안 덥고 괴로울 수도 있어. 지금까지 고생한 것보다 더 고생할지도 몰라."
"엄마, 지금까지 내 경험을 미루어 볼 때, 팬 기차라면 창문을 열어놓고 달릴 것 아니야. 로컬 팬 버스도 그랬잖아. 내내 정차해 있다면 문제겠지만, 계속 달릴텐데, 뭐."
연짱이 의견대로 팬 좌석 구입. 숙소 문제도 해결하였고, 기차표도 구매하였더니, 긴장이 풀렸는지 그제서야 허기가 졌다. 펫부리 행 롯뚜 탑승 전 사두었다가 미처 먹지 못하였던 햄치즈 샌드위치와 요구르트를 함께 꺼내서 아이에게 주고 나도 먹는데, 따뜻했던 샌드위치는 제 때 먹지 못하여 이미 다 식어 있었고, 처음의 열기 때문에 잔뜩 눅눅해져 풀 죽어 있는 게 꼭 나와 연짱이 꼴 같았다. 그걸 꼭꼭 씹어 먹다가 문득, 연짱이 얼굴을 보니, 전 날 오전부터 내내 씻지 못한데다 날도 밝기 전 신새벽부터 흘린 땀까지 범벅이 되어 땟국물 졸졸, 흐르는 꼴이었다. 그 꼴을 하고 먹고 살겠다고 이게 뭐야.
"어린이, 네 얼굴 정말 어떡하니. 땟국물 졸졸, 흐른다, 진짜."
"나 참. 엄마는 뭐 예쁜 줄 아나 봐."
아이도 나도 귀하게 자라지는 못하였어도 나름 곱게는 컸는데, 멸균 물티슈로 얼굴하고 손하고 대충 닦아내고서, 회 먼지 켜켜이 앉은 웬 역사 돌벤치에 앉아서, 한 달 열흘은 굶은 거지들처럼 허겁지겁 다 식어빠지고 눅눅해진 샌드위치를 먹고 있다니.
"와, 누가 보면, 웬 거지 둘이 어디서 다 식어빠지고 눅눅한 샌드위치 얻어 와서, 오랜만에 샌드위치 먹어본다며 좋다고 웃으면서 먹는 줄 알겠다."
"뭘, 엄마는 그 얼굴로 기차표 구매하면서, 고맙다고 역무원 언니한테 우리나라에서 갖고 온 사탕도 나눠줬잖아. 그 때 언니 얼굴 봤어, 엄마? 이런 거 너나 먹지 뭘 나까지 챙겨주겠다고 그러니, 하고 안스러운 얼굴이었다고.ㅋㅋ"
"어쩐지, 언니가 자꾸 '마이뺀라이(IT'S OK)' 하더라."
그 때, 나와 연짱이를 안스럽게 바라보던 옆 벤치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는데, 아줌마가 부시럭 부시럭 뭘 꺼내서 건네준다. 새 물이었다. 정말 둘이 끼룩끼룩, 웃느라고 숨이 다 넘어갈 지경이었다. 와, 진짜 이 번 여행은 여러 모로 역대급 대박이다, 연짱이가. 그 와중에 기차는 40분 쯤 연착되었다.
펫부리 구 역사. 바로 옆에 신 역사를 짓고 있었고, 온갖 공사 부자재를 쌓아둔 바람에 구 역사는 안팎으로 매우 어수선하였으며, 공사 중 날리는 먼지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새로 짓고 있는 신 역사.
역시 한창 공사 중인 신 역사 매표 창구. 켜켜이 먼지 앉은 역사 돌 벤치. 먼지 구덩이 공사 중인 이곳에 연짱이와 함께 앉아 다 식어빠진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먹었다.
쏨밧투어 오버나잇 버스에서 나눠 준 먹을거리.
"깜깜할 때는 모르고 먹었는데, 왼쪽 빵은 밝은 데서 보니까 도저히 못 먹겠어, 엄마. 빵에 무슨 색소를 넣은 거지?"
원효대사의 해골 물도 아니고, 똑같은 먹을거리인데, 밝은 데서는 먹을 수 없게 되는 매직.
비닐 코팅 된 포장 때문에 날아가지 못한 습기로 잔뜩 풀 죽은 샌드위치. 다 식어빠진 건 덤. 멀쩡해 보인다면,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살겠다고 땟국물 줄줄, 흐르는 얼굴들을 하고서, 아주 꼭꼭 씹어 먹었었다.
열차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