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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사서 하는 고생(3)

이동 7. 팬데믹 중 깡시골 여행의 다른 이름, 쁘라쭈압으로 

40분 연착한 3등 팬 기차는 90도 각도 등받이가 있는 벤치였다. 우리가 탑승하고 나서 바로 기차는 출발하였고, 한낮이어서 더울까봐 걱정하였던 것이 무색할만큼, 좌석도 객실도 그만하면 편안하였다. 다만, 탑승객이 많아서 밀려 밀려 우리가 안착한 객실이 화장실 딸린 객실이었는지, 오래 묵은 암모니아 가스 냄새가 객실 구석구석까지 휘날렸지만, 기차가 달리는 동안에는 냄새가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날아가기 때문에 별 문제 없었다. 


착석하고 나니 안심한 마음에 평정이 찾아들었고,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좌석 주변에는 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옆 열 좌석 전체를 차지하고 누운 할머니(라고 하지만, 아마도 엄마 또래일 거라고, 연짱이가)는 기차 선반에 올려놓은 스티로폼 박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맞은 편 좌석을 다 적시는데도 아랑곳 없이 쿨쿨, 잘도 잔다. 그 태평함이 경이로웠다. 한 시간 쯤 지나 결국, 승무원 오빠 둘이 자는 할머니를 깨워 물 떨어지는 스티로폼 박스를 치우게 하였다. 


더운 나라 기차는 정차역마다 행상들이 탑승하여 먹을거리를 판다. 외국 사람인 우리는 무엇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먹을거리들을 탑승객들은 쉽게 사 먹었다. 뭘 알아야 사 먹지. 태평한 스티로폼 할머니는 올망졸망 보따리가 전부 먹을거리던데, 행상에게서 정말이지 끊임없이 먹을거리를 사 먹었다. 우리도 뭐 먹을까? 장거리 오버나잇 버스에서 배 고플 때 먹으려고 난에서 미리 사 두었던 마들렌을 연짱이에게 꺼내주고, 나는 전통 쌀과자를 꺼내 먹었다. 달리는 기차 창문으로 바람이 쏴아, 들어와, 오물오물, 와삭와삭 먹을거리를 먹는 나와 연짱이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말만 들으면 무슨 CF의 한 장면 같겠지만,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씻지 못해 땟국물 졸졸, 흐르는 얼굴에, 30시간 감지 못하여 떡진 머리는 원하는 스타일링이 아니라는 사소한(?) 문제와 함께, 빠르게 달리는 기차 안에서 푸드덕, 거리며 저절로 스타일링이 되었다. 같은 사자 머리여도 미스코리아 언니들의 사자 머리는 얼굴 작아보이고 예쁘던데, 이게 뭐람. 


"와, 어린이, 너 지금 오래 굶고 오래 안 씻은, 갈기 다 엉킨 사자 같아." 

"엄마는 무슨 예쁜 치타 같은 줄 아나 봐. 나랑 똑같아, 엄마도." 


둘이 정말 미친 사람들처럼 웃었다. 이게 뭐야. 인간의 존엄성 아닌, 언니의 존엄성 따위 왼쪽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섞여 오른쪽 창문으로 훠이훠이, 날아갔다. 


"뭐 어때. 괜찮아. 어차피 일평생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이고, 우리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데, 뭐. 우리를 기억이나 하겠어?" 


그래. 제발 아무도 기억하거나 알아보는 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몰골로 입 주변에 과자와 빵 부스러기를 잔뜩 묻히고 웃다가 문득, 내다 본 창 밖 풍경은 뭐라 말 할 수 없이 비현실적이었다. 지금껏 다녔던 태국 북부와 너무 달라서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았다. 높거나 야트막한 산과 숲, 나무에 가려져 시야가 올망졸망하였던 북부와 달리, 시야 가득 온통 너른 연두색 초원이었으며, 보이는 나무들 대부분이 잎 넓은 야자수였고, 도랑이나 개천 대신 저수지 혹은 연못이 있는 풍경이 중간 중간 이어졌다. 연두색 초원에는 소 뿐 아니라 말도 흔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광활하고 시원하게 확장된 제주도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연두색 초원 너머로 초록선이 이어져서, 처음에는 누군가 들짐승 유입을 막으려고 쳐놓은 초록 그물망인 줄 알았는데. 바다였다. 시야 너머 온통 초록 수평선이 가로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원래 바다가 저토록이나 막힘이 없는 데였나.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보았던 바다와 너무도 다른 느낌이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단언코, 내 평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트루먼'이 바다 너머 수평선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실은, 하늘색 벽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지금까지 알던 것이 다 뒤집히는 느낌. 지구는 둥글고, 나는 계획된 틀 안에 살고 있구나. '바다 속 물고기'는 그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었구나. 물꼬 터진 생각들이 쉼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엄마, 여기 더운 남부 맞나 봐. 나무가 다 야자수야. 생각해보면 북부도 태국 지역인데, 거기서는 왜 야자수를 쉽게 못 봤지?" 


그러게. 




어느 순간부터, 세상에 풍경과 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태국 왕실의 여름 별궁이 있는 후아힌을 지났다. 


"엄마, 여기 필리핀 같아." 

"읭? 너 필리핀 한 번도 안 가 봤잖아." 

"그냥 필리핀이 이런 느낌일 것 같다고." 


그런가요?ㅋㅋ 


펫부리서부터 타고 온 3등석 기차. 


아담한 쁘라쭈압키리칸 기차역. 


쁘라쭈압에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숙소까지 어떻게 가지? 도보로도 충분한 거리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더는 육중한 캐리어를 끌고 낯선 거리를 걷고 싶지 않았다. 그 때, 이 동네 장기체류자로 보이는 아저씨가 두리번거리고 있는 내게 말을 걸었다. 


"뭐 찾니?" 

"여기 뚝뚝이나 썽태우 없어요?" 

"없어. 썽태우 없다고."

"엄마, 저 아저씨 뚝뚝 아저씨 아니야?" 


뚝뚝 아저씨는 우리를 태우고 폴리스 사거리와 피어(PIER)를 지나면서, 쁘라쭈압에는 금요일과 토요일에 장이 크게 서고, 시계탑 주변에는 먹을거리 시장이 매일 서며, 인구 중 공무원 비율이 가장 높고, 그 외 어부가 이십 몇 퍼센트, 농부가 십 몇 퍼센트 정도라며 쁘라쭈압 전반에 관하여 설명을 해주었다. 고마웠다. 


"엄마, 아저씨 명함 잊지 말고 챙겨." 


쁘라쭈압 수박 주스. 


"땡모빤은 북부든, 중부든, 남부든 옳아." 


"안녕, 저기, 조금 더 가면 경극 무대가 있어. 봤니?" 

"어, 아니오." 

"저녁 6시부터 한다니까 구경해 봐." 

"네, 고맙습니다, 부인." 

"엄마, 저 아줌마, 하얀 원피스 입고 있어서 천사인 줄 알았어. 되게 사뿐사뿐한 아줌마야. 우리가 중국인인 줄 알았나 봐."


먹을거리를 들고 숙소 쪽으로 걷고 있는데, 하늘하늘한 흰 드레스를 입고 자전거를 끌고 가던 서양 아주머니가 굳이 멈춰서더니, 우리에게 경극을 권해주었다. 팬데믹 중이어서 중국인들 미움 많이 받을텐데, 매우 편견 없는 아주머니일세. 


작은 어촌 마을 쁘라쭈압에 땅거미가 내린다. 


"와, 엄마, 하늘 좀 봐. 분홍색하고 보라색하고 푸른색이 엄청 멋지게 그라데이션 되었어. 사진은 눈으로 보는 것처럼 멋지지 않으니까, 엄마, 눈으로 많이 봐."


분홍빛, 보라빛 하늘이 드라마틱하게 저물고 있었다. 펫부리에 묵지 않고 바로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펫부리가 좋은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후회는 들지 않았다. 경험한 적 없어 익숙하지 않은 습한 공기에 다리까지 땀이 나서 바지가 피부에 척척하게 휘감겨 들러붙고, 어촌 특유의 짠 냄새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에 안착하길 잘 하였다. 만 48시간 만에 제대로 된 잠자리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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