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짧은 글 모음
0105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은 우울도 사치라지
오랜만에 크게 울었다
딱히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아닌가 난 좀 힘들었나
우니까 내가 힘들었던 기억들이 자꾸 올라온다
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누군가의 기대도 누군가의 안타까움도 또 누군가의 사랑도 누군가의 자존심도
난 누구를 위해 살고 있나
태어났으니 살고는 있다 태어났으니 살고 있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모든 관계가 어그러짐을 뼛속 깊이 느낀다
내가 우는 게 나중에 보면 웃긴 얘기란다
뭐 어쩌면 그럴 수도
고집을 피우고 절대 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은 나다운 선택이 아니라며 짜증 난 얼굴로 대답한다
다 나를 위한 조언이겠지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겠지
라며 나를 다독여봐도
반항심만 드는걸
울면 조금 진정이 된다더니 정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된다더니 정말이다
시간이 흘러가도 내 기억이 점점 또렷해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죽음으로 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을까
아니 죽음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만 죽는 거지
영원할 것 같던 모든 건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붙잡으려 해도 이미 내 손을 떠난 걸 어쩌겠어
진지하게 울던 내 모습도 한순간에 사라지는걸
어떤 감정도 어떤 방향도 어떤 시간도 내게는 의미 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0110
너라는 핑계
어떤 이유에도 흔들리지 않던 내 굳은 심지는 너라는 핑계로 무너진다
넌 나의 남자친구니까 넌 나의 친구니까 넌 내가 사랑하는 존재니까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니까
그런 이유로
그래서 핑계를 대면 좀 나아질까
아니면 네가 싫어질까
네가 싫어질까 봐 나는 조금 두렵다
0113
구두를 처음 신었다
7센티 굽이었나 굽이 꽤 높다고 느꼈다
내 키가 무척 커졌다
처음 움직일 때는 발이 안 아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지 않았음을 느낀다 난 꽤 연기를 잘하는 애였구나 느낀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마치 구두 같다
신기전에는 구두의 느낌을 상상하기 힘들다 그리고 신고 나서는 아프다가도 점점 익숙해진다 나도 모르게 점점
대학에 떨어지면 죽어야지 다짐하던 이도 헤어지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연인도 이혼한 부부들도 크게 다쳐서 더 이상 내 꿈을 이루지 못하는 이도 욕먹고 손가락질받는 삶을 사는 이도, 내가 절대 하지 못할 거라고 여기던 것들은 언젠가는 전부 내 것이 되어 익숙하게 살아간다
인생을 장담하며 살 수 없듯이 구두를 신고 어떻게 넘어질지 구두 굽이 부러질지 모르는 일이다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 것처럼
하지만,
익숙해지다가도 오래 걸으면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 통증은 지울 수도 없앨 수도 없다
그럴 때는 잠깐 쉰다 쉬다가 나아지면 또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그렇게 1년, 10년, 20년...
결국 집에 도착하니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생겨있더라
처음 신은 구두를 너무 오래 신어서 인지 아니면 그냥 신어서는 안 되는 거였는지
근데 이건 확실하다
난 그럼에도 또 구두를 신을 거라는 거
또 신고, 또 걷고, 아파하지만 또 신을 거다
새끼발가락은 아직도 아프다
아프지만 또 신을 거다
그래서 구두는 인생 같다
0113
가득 찬 욕망 따위
사람들이 말하는 돈 명예 지위 인간관계
내가 원한 적도 없는데 원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들
누구나 사랑받길 원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나를 지맘대로 평가하는 손가락들
괜찮은 줄 알았지만 실은 괜찮지 않은 것들이었다
한 번도 괜찮은 적 없는 것들이었다
단 한 번도
다들 괜찮은 척 연기하며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태어났으니 살고 있는 걸까
행복에도 점수가 있다면 그건 매일 달라지는 점수일 거다 나는 매일을 행복했다가 우울했다가를 반복한다
욕망 따위 나에게는 필요 없는데
누군가 떠밀듯이 나는 욕망하기를 갈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