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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핌을 감춘 레이첼

다시 시작된 제이콥의 여정

by 무이무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 반쯤 잠긴 달빛만이 하란의 모래를 하얗게 세고 있었다. 모래언덕을 따라 세 마리의 낙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별빛은 묵묵히 그들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제이콥은 두 아내와 아들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광야로 나섰다.

20년간의 땀과 눈물로 일군 양 떼도, 그의 사람들도 모두 뒤에 두고 왔다. 제이콥의 출가를 사람들은 만류했을 것이고, 레이벤은 끝까지 붙잡으려 들 터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 밤, 그림자를 등에 업은 채 조용히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의 결정을 누구도 막지 않았다. 공포도 없었다. 이미 마음이 떠난 곳에서 더 잃을 것은 없었으니까.

바람 끝에 실려오는 싸늘한 한기 속에서, 그들은 모래언덕을 넘으며 서로의 숨소리만을 들었다. 제이콥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과거와 재산, 그리고 레이벤의 그늘은 이제 더 이상 그를 붙들 힘이 없었다. 앞을 비추는 것은 오직 별들이 가리키는 길, 그리고 가족들이 지닌 생의 불빛뿐이었다. 잠든 아이들이 낙타 위에서 몸을 뒤척일 때마다, 제이콥은 자신이 선택한 운명의 무게가 고요히 가슴에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구름 속에 감춰졌던 달이 다시 하늘을 비치자, 저 멀리 묘하게 도드라진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앞서 가던 루벤스가 손짓하자 제이콥은 바위 앞에 서서 한참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의 마음속으로 오래된 약속의 목소리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아브라함의 언약.

“그래, 내가 이 자리에서 꿈을 꾸었다.”

그는 사경을 헤매던 시절을 떠올렸다.

아이작의 신은 나를 버린 것인가, 아브라함의 신은 약속을 잊은 것인가—

그러나 그때, 빛의 존재들이 이중나선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던 광경을 꿈꾸며 나는 깨달았다.


신과 인간의 연결은 장소에 매이지 않는다.

내가 선 이곳이 곧 신의 자리이며, 그 경계는 오직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아이작의 진정한 축복은 재물이 아니고, 장자의 명분 역시 인간이 부여한 허상일 뿐이다.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이 이어지는 지점은 바로 지금, 여기였다.

그 돌 앞에서 느낀 확신만은 의심할 수 없었다.


그는 레이벤의 성에서 자신을 시험하며 광야의 깨달음을 얻었고, 그 곁에는 언제나 레이첼이 있었다. 이제 눈에 보이는 재물은 허상일 뿐.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은 무한한 가능성의 광야로 떠날 자유라는 사실만이 남았다.




새벽녘, 동이 트자 모래가 일며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레이벤과 데이몬이 선두였다. 제이콥의 장성한 아들들은 일제히 칼을 뽑았다. 목축업으로 단련되어 다부진 루벤스, 키가 크고 준수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리바이스, 소문난 용사 셋째 주디스까지. 늘 “조무래기들”이라 비웃던 데이몬조차 이제는 그들의 기세 앞에 장난을 칠 수 없었다.


그러나 제이콥의 초라한 행렬을 본 레이벤의 얼굴에는 묘한 안도감이 스쳤다. 그는 말에서 내려 손을 들었다.


“제이콥, 안심해라. 네 아들들에게 칼을 거두게 해라. 나는 널 해치러 온 것이 아니다. 네가 떠난다는데 내가 더 이상 붙잡을 수는 없지. 넌 본디 자유의 몸이고, 내 딸들은 이미 네 사람이니 내가 무엇을 더 어찌하겠느냐.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테라핌을 모시는 사제다. 그런데 누군가 내 테라핌을 훔쳐갔다. 내 장막에서 그것을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레이첼뿐이겠지.”


제이콥은 손을 들어 아들들을 진정시켰다.

“얘들아, 칼을 거두어라. 삼촌이시여, 어찌 여기서 그 신상을 찾으려 하십니까? 원하신다면, 우리 짐을 모두 뒤져보십시오.”


레이첼은 낙타 안장 위에 몸을 웅크린 채 신음했다.

“아버지… 죄송해요. 아무 말 없이 떠난 건… 하지만 제이콥을 보내고 하란에 남을 수 없었어요. 전 자식도 없고… 이렇게 절 사랑해 주는 이는 세상을 다 뒤져도 못 찾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생리통과 하혈이 심해 내려갈 수가 없어요. 아버지 발에 입 맞추지 못함을 용서해 주세요…”


레이벤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지더니, 이윽고 체념 섞인 미소가 번졌다.

“아니다, 나의 막내야. 테라핌께서 나를 떠나 너에게 가셨다 해도… 그 또한 테라핌의 뜻이겠지.”


결국 테라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제이콥이 입을 열었다.

“삼촌이시여, 얼룩진 양 떼도, 흠 있는 양들도… 그 모든 재산은 본디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레이첼을 얻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남은 결과일 뿐입니다. 진정한 보상은 사랑이고, 그 결실은 제 아들들입니다. 이렇게 빈손으로 떠나는 저를… 한밤에 쉬지도 않고 쫓아오신 겁니까?”


레이벤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내 복은 넘치고 흘러 감당도 어렵다. 내 딸들이 어디로 가든 테라핌의 가호가 너희를 지켜주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우리 행렬의 후발대가 곧 도착할 것이다. 생각해 보니 네가 떠나고 나면 이 많은 가축을 너처럼 키울 수도 없다. 그리고… 제이콥, 한 가지만 명심해라.”
레이벤의 목소리가 낮고 깊게 가라앉았다.
“네가 고향으로 향한다면, 네 형 에이서스의 세력을 절대 얕보지 마라. 그는 아직 너를 곱게 여기지 않을 테고, 그의 사람들은 사냥꾼이라 바위산을 노루처럼 넘나든다. 그들의 화살은 바람을 타 십리를 날아가니, 방심하면 큰일을 당한다.”
그는 잠시 제이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형의 마음을 풀지 못한다면, 너의 가족은 물론… 나의 하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미리 선물 하나쯤은 준비해 두거라. 피를 부르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레이벤은 말고삐를 한 번 쓸어내리며 덧붙였다.
“이 가축들은 네 길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사양 말고 데리고 가라.
그리고… 네가 홀로 떠났다고 분개한 너의 목동들이 지금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눈길을 멀리 던졌다.
“아마 그들도 너를 따르겠다고 나설 것이다. 그러니 모두 이끌어라. 험한 여정에서 그들만큼 든든한 힘도 없으니.”


역시나였다.

제이콥을 붙잡지 못하자, 레이벤은 테라핌을 핑계로 찾아온 것이 드러났다. 결국 그의 관심은 제이콥이나 에이서스를 견제하겠다는 계산, 오직 자기 생존 전략뿐이었다.




레이첼은 떠나기 전, 아버지의 장막에서 눈여겨보던 테라핌을 몰래 훔쳐 나왔다. 테라핌은 레이벤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고대 에티오피아인의 조상들이 코끼리의 어금니로 조각한 신상—이집트와 아라비아 상인들에게서 거금을 주고 얻은 물건. 그는 테라핌을 절대적 신탁처럼 여기고, 양들이 번성하고 물이 마르지 않는 이유를 모두 그 여신의 힘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 신상에 대한 집착은 사람보다 신상을 더 귀히 여기는 태도를 낳았다.

그를 진정으로 부유하게 한 것은 제이콥, 가축들, 딸들, 그리고 노동자들이었지만—그는 모든 공을 테라핌에게 돌렸다. 사람의 가치를 양가죽 1 평방야드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레이첼은 그런 아버지가 지긋지긋했다.

겉으로는 성직자인 척 굴면서, 속으로는 사람을 계산기 숫자 취급하는 아버지에게 작은 복수라도 하고 싶었다. 테라핌이 없어진 빈자리를 통해 아버지가 무엇을 잃었는지—정말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길 바랐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국보급 조각상은 꽤 비싼 값에 팔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몰랐다.

그날 훔쳐 나온 작은 신상이, 훗날 그녀의 삶을 얼마나 무너뜨릴 씨앗이 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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