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된 제이콥의 여정
제이콥이 하란에 발을 디딘 지도 어느덧 스무 해라는 세월이 흘렀다.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그는 낯선 환경 속에서도 눈을 반짝였다. 광야의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의 마음은 뜨거웠다. 그는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누구도 탐내지 않는 것에서 가능성을 찾았다.
그의 성품과 지혜는 곧 행동으로 드러났다.
레이벤이 두 딸 레아와 레이첼, 그리고 재산의 일부를 제이콥에게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그 조건을 감사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제이콥은 달랐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가치보다, 스스로 일궈낼 수 있는 가능성을 선택했다.
“흰 양과 귀한 재산은 삼촌의 것입니다. 대신 아무도 찾지 않는 검고 얼룩지고 점 있는 양들을 제게 주십시오. 그들을 제가 키우겠습니다.”
사람들은 어이없어 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상품 가치 없는 양을 달라니 바보같다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는 눈에 보이는 가치는 허울 뿐임을 아버지 아이작의 축복에서 이미 깨달은바 있다.
제이콥은 양들의 본성을 관찰하고, 시장과 자연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그는 그 흠 있는 양들을 이용해 점차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갔다. 흑양과 얼룩양, 점 있는 양들은 처음에는 쓸모없어 보였지만, 제이콥의 손을 거치며 강인하고 건강하게 자라났고, 점점 더 가치 있는 재산으로 변모했다.
제이콥은 사랑하는 레이첼을 위해 14년을 묵묵히 인내했다.
그 긴 세월 동안 억울함과 분노가 마음을 스쳐도, 그는 끝내 기다렸다.
레이첼 대신 언니 레아가 그의 곁에 앉은 순간, 그는 장자의 명분은 형 에이서스에게서 빼앗을 수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진정한 장자의 명분은 힘이 아니라, 인내와 희생에 있음을 그는 알게 되었다.
그의 기다림은 사랑을 지키는 견고한 성벽이자, 마음을 단련하는 매일의 훈련이었다.
그 인내 덕분에 제이콥은 믿음과 사랑으로 세운 힘을 가진 남자가 되었다.
세월이 쌓이자 하란의 성주 레이벤은 부자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성문 밖까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풍요의 한가운데서 자라난 또 다른 힘이 있었다. 바로 제이콥 자신의 집이었다.
그의 양떼는 이제 레이벤의 부를 능가했고, 그의 하수인들과 가축, 장막과 창고는 하란성 한켠을 차지했다. 사람들은 속삭였다.
“이제 하란에는 두 명의 주인이 있는 셈이지."
레이벤의 마음속엔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자신이 키워낸 제이콥이 어느새 자신과 맞먹는 권세를 가지게 된 현실이 못내 불편했다. 겉으로는 웃었지만, 그의 눈은 점점 제이콥의 장막 쪽으로 향했다.
“그가 없었으면 이렇게 부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나 또한 이 땅의 유일한 주인이었을 것이다.”
시간은 냉정했다. 제이콥은 여전히 묵묵히 일했고, 그의 아들들은 청년이 되었다. 장남 루벤스, 차남 리바이스, 그리고 셋째 아들 주디스.
그들은 어릴 적부터 들판과 축사에서 자라, 땀과 흙의 냄새를 몸에 익혔다. 그러나 하란의 성 안에서는 또 다른 세력이 자라고 있었다. 레이벤의 양아들들, 제이콥을 경계하며 자란 자들이다. 그들에겐 제이콥의 번영이 곧 레이벤의 후계자로써의 불안을 가져왔다.
결국 어느 해, 메마른 여름날.
우물가에서 두 세대의 젊은 피가 마주쳤다.
제이콥의 아들들, 루벤스와 리바이스, 그리고 셋째 주디스가 양떼를 몰고 우물가로 향했다.
그 우물은 제이콥이 처음 하란에 왔을 때, 주변 부족이 도발하려 큰 돌로 덮어놓았던 바로 그 우물이었다.
지금은 하란의 남자들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 돌을 덮어놓았지만, 오늘의 긴장은 내부에서 벌어졌다.
세 형제가 먼저 도착해 힘을 합쳐 우물의 돌뚜껑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멀리서 레이벤의 양아들들이 나타났다. 체격이 크고 눈빛이 날카로운 청년, 데이몬이 선두에 섰다.
그는 레이벤이 하란에서 길러낸 양아들 중 가장 뛰어난 자였으며, 스스로 자신이 레이벤의 후계자라 여겼다.
그의 눈빛은 뱀보다 교활했고, 혀는 칼끝보다 날카로웠다.
“어이, 꼬맹이들! 지금 당장 우리 우물에서 손 치워라.”
루벤스가 얼굴을 들었다.
“우리가 먼저 와서 열고 있다. 먼저 온 자가 우물을 열고, 나중 온 자는 기다렸다가 사용 후 우물문을 닫고 가는 것이 하란의 법도가 아니었던가?”
데이몬은 코웃음을 쳤다.
“하란의 법? 이 땅의 물은 하란의 자식들에게 먼저 허락된 것이다.
이방인의 자식이 감히 순서와 법도를 따진단 말인가?”
그 말에 루벤스의 얼굴이 굳었다.
“우린 이방인이 아니다. 내 아버지 제이콥은 하란 성주 레이벤의 조카이며, 모래바람 속에서 헤매던 하란의 양떼를 모아 피와 땀과 눈물로 하란에 바쳤다.
하란의 부는 우리 아버지의 손에서 피어난 것이다. 그 공로를 당신들이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주변에서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런 조무레기들이, 하하, 니들 아비 공로가 대단하다니, 도둑질로 피어났겠지.”
“점술과 얕은 꾀로 양을 훔쳐 부자가 됐다던데?”
루벤스의 눈이 번뜩였다.
“아브라함의 가문을 욕보이지 마라. 그 입을 다물지 않으면, 혀를 잘라 땅에 묻어주겠다.”
그 순간, 레이벤 측에서 돌멩이가 날아와 루벤스 곁에 있던 양 앞에 떨어졌다.
소리에 놀란 제이콥의 검은 양 한 마리가 마구 돌진하며, 레이벤의 양 중 한 마리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꽝!”
피가 흘렀고, 양은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데이몬이 소리쳤다.
“보아라! 이방인의 양이 하란의 귀한 양을 죽였다!
제이콥의 자식들은 교활한 아비의 꾀를 닮아, 양까지 살인을 배웠다!”
돌멩이가 몇 개 더 날아들자, 화가 치밀어 오른 루벤스가 허리춤에서 엉킨 양털을 자르는 단검을 빼들었다.
리바이스가 루벤스를 붙잡으며 말했다.
“지금은 아니다. 싸우면, 진실이 그들의 손에 묻힌다.”
그날 밤, 제이콥의 장막엔 무거운 침묵이 깃들었다.
그는 아들들을 불러 앉혔다.
“루벤스, 리바이스, 주디스. 오늘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고 있느냐.
너희의 분노는 이해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결코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동안 우리 가문이 하란 땅에서 지켜온 명예와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짓이다.”
제이콥은 등불아래서 거친 손으로 양피지를 말아 쥐듯, 한마디 한마디를 꾹꾹 눌러 담았다.
“하란은 메말라 불이 쉽게 번지는 들판이다. 말 한 마디, 피 한 방울이 전쟁의 불씨가 된다.
그러니 너희는 칼 대신 침묵과 인내로 싸워라.”
루벤스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아버지, 침묵이 진실을 지킬 수 있을까요? 저들의 간악함을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제이콥은 천천히, 낮지만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실은 항상 감춰진 듯, 드러나지 않을 것 같지만…
언젠가 한 번 드러나면, 세상을 광명으로 밝힐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장막 속을 넘어 들판까지 울릴 만큼 깊었다.
제이콥은 오랜만에 레이첼의 손을 꼭 잡고, 두 사람이 함께 오르던 절벽 끝자락에 섰다. 바람이 차갑게 불어왔지만, 그들의 마음은 따뜻했다. 아래로 펼쳐진 하란의 들판은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났고, 멀리서 들려오는 양들의 울음소리가 잔잔한 음악처럼 흘러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수없이 많은 별들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제이콥은 손을 뻗어 별을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레이첼, 저 별들을 봐. 우리가 함께한 세월만큼이나 많은 별들이 있네.”
레이첼은 조용히 웃으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이 별들처럼 우리의 시간도 빛나겠지.”
그 순간, 별들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별똥별이었다.
하얀 빛이 어둠을 가르며 떨어지자, 제이콥은 무릎을 꿇고 소원을 빌 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을, 레이첼과 두 사람의 미래를 지켜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별똥별은 잠시 하늘을 가르다가 사라졌지만, 그 빛의 잔향은 두 사람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았다.
제이콥은 조용히 레이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별똥별을 봐, 레이첼. 우리가 함께라면, 어떤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어.”
레이첼은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두 사람의 숨결이 바람과 섞이며, 절벽 위에서 세상은 잠시 멈춘 듯 평화로웠다.
별빛 아래, 제이콥과 레이첼의 마음은 하란의 들판 위 모든 시기와 질투, 갈등을 넘어 새로운 결속을 다졌다.
그리고 제이콥은 결심했다.
별똥별이 제자리에서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서 홀로 떠나듯, 이제는 하란성을 떠나야 한다고.
그들의 사랑과 미래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