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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피스토 Aug 25. 2020

식물의 처음을 기억한다는 것


새 식물을 받아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식물의 ‘처음’을 사진으로 남겨놓는 것이다. 식물이 가장 건강한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랄까. 식물은, 처음을 기억하는 힘으로 자란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로덴드론 파스타짜넘Pilodendron Passtazzanum은 하트 모양의 잎 중심에서 방사형으로 퍼진 잎맥과 진녹색의 광택이 매우 매력적인 식물이다. 가만히 있는데도 역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1970년대 에콰도르 파스타짜 주에서 처음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름이 어렵다보니 보통 해외 식물집사들 사이에선 편하게 '파스타'로 부르는 모양이다.


나 역시 이 '파스타'를 처음 접했을 때 감탄사로 인사를 대신했다. 문제는 가끔 식물을 아이언맨 피규어쯤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장식장에 진열해놓고 감탄사만 연발해도 죽지 않는 피규어처럼 식물을 키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분에 식물은 온데간데 없고 묘비명 같은 이름표만 발견하게 되는 상황이랄까.


사람도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면 ‘물갈이’를 하는데, 식물이 새로운 환경에서 바로 적응한다면 더 이상한 일이다.

농장이라는 최고의 환경에서 자란 식물이 물맛도 다르고 볕도 다른 환경에 적응하려면, 전적으로 주공을 잘 만나 몸을 의탁하는 수밖에 없다.


식물호르몬 중엔 에틸렌이라는 것이 있다. 일종의 스트레스 호르몬이다. 에틸렌 호르몬은 과일을 숙성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관엽식물에게는 꽃과 잎을 시들고 죽게 한다.


식물이 상처를 입거나 병원체의 공격을 받을 때, 산소가 부족하거나, 덥고 추울 때 이 에틸렌가스를 방출한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 과실을 빨리 성숙시켜 종자를 후대에 남기려는 일종의 진화 전략이라는 것인데, 새로운 환경으로 온 식물에게 적응이 필요한 이유도 이동하는 동안 에틸렌 호르몬을 내뿜으며 생존의 몸부림을 쳤기 때문이다.


큰 잎을 달고 온 ‘파스타’는 새 화분에 옮긴 후 십수 일이 지나자 서서히 ‘처음’의 모습을 잃기 시작했다. 광택은 쓸모없다는 듯 버렸고, 잎맥의 입체감마저 버거운 듯 한두 장씩 누런 잎을 띄우며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감탄사를 내뱉게 했던 식물의 처음은 그렇게 잊히는 듯했다. 무능한 주인이 스트레스를 적절히 풀어주지 못한 탓이었다.

 

‘파스타’가 잎 하나를 겨우 붙잡고 있을 즈음, 식물에 비해 화분이 너무 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끌려다니느라 스트레스가 심했을 텐데 작은 뿌리로 깊은 화분의 물을 소모하려니 탈이 날 수밖에.


뿌리 과습의 구렁텅이로 빠지기 직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분에서 식물을 빼보니 뿌리는 물컹해져 있었다. 황급히 무른 부분을 도려내고 작은 화분으로 옮겼지만, 처음보다 더 이전으로 돌아간 '파스타'는 줄기 하나만 겨우 남겨놓고 숨을 헐떡일 뿐이었다.  


다시 힘을 내 새 잎을 낸 '파스타'


이내 ‘파스타’가 원숙미를 다 버리고 여린 새 잎을 내기까지는 족히 몇 개월이 걸렸다. 그날 이후 나는 식물을 처음 맞이할 때 식물의 ‘프사(프로필 사진)’를 찍기 시작했다.

 

대품의 행복수를 무려 네 그루나 죽여먹은 적이 있다. 화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물이라도 한번 죽인 식물을 다시 키우기란 보통 일이 아닌데, 그땐 어떤 오기가 발동했던 것 같다. 다섯 그루째 행복수를 사러 간 날, 화원 주인에게 “이번에 또 죽일까봐 걱정이네요” 하니, “죽으면 또 사면 되지요” 하며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던지더라.


식물이 이렇게 쉬운 거였나? 그 말을 듣고 적잖은 충격을 먹은 나는 식물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고 되돌아왔다. 그렇게 오기로 키우는 식물이 잘 자랄 리 없다.


나에게 식물의 첫 '프사'를 찍는 일이란 첫 기억의 힘을 빌리려는 일종의 주술과 같은 것이다. 처음의 기억은 언제나 옳지만, 우리의 기억력은 언제나 짧으니까. 식물의 첫 '프사'가 그 기억의 힘을 길러줄 거라고 믿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식물을 위해 드는 유일한 보험이다.


필로덴드론 파스트짜넘

천남성과의 덩굴성 식물이다. 브라질과 서인도제도가 원산으로 200여 종이 있다. 햇빛은 간접광이 좋다. 아침에 몇시간은 직광을 쬐어도 된다. 온도는 10~35℃에서 잘 자란다. 습도는 65~75%에서 가장 잘 자란다. 공중습도가 어느 정도 높아야 한다. 물은 겉흙이 말랐을 때 충분히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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