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엇을 감내할 수 있습니까?
하고 싶은 일'과 '잘 하는 일' 중 어떤 것을 해야 할까요?
강의가 끝나고 한 청중이 물었다. 수도 없이 생각했고 수도 없이 들었던 질문이다. 그러나 정말 신기하게도 얼마 전에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바뀌었다. 무엇과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나 성공한 사람들의 강연에서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한 방법들을 말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좋은 약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알아내려 하면 할수록 더 많이 알게 되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삶은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 그리고 그 답은 점점 모호함을 향해 다가간다. '이럴 땐 이래야 해.'라고 자신있게 말하던 것이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게 좋아.'로 조금 완곡해지더니, 결국 '인생에 정답은 없어.'로 귀결되니 말이다.
잘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단 생각을 합니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정답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을 위해 포기하거나 치러야 할 비용을 감내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억지로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낸 후, 그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선택이나, 당장의 성과나 인정은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을 묵묵히 꾸준히 해서 성과로 만드는 선택은 둘다 각자의 인생에서 의미있는 것들일 겁니다. 내가 무엇을 감내할 수 있을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는 건 어떨까요?
"제 특강 외의 캠프 강의, 더이상은 하지 않겠습니다."
5년 전 어느 날, 이제 고작 몇 번 강단에 서봤던 생초보 강사였던 나는 한 진로캠프 관계자에게 이렇게 선전포고했다. 초보강사에게는 단 한 번이라도 강단에 서는 것 자체가 영광이고 기회였다. 하지만 내 삶이 그러하지 않음에도 주어진 강의안으로 청중에게 거짓으로 강의하는 것을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당장 강의 기회가 없어 굶더라도 내가 선택한 이 업(業)에 당당하고 싶었다.
거짓말처럼 그나마 들어오던 캠프 강의들이 예리한 검으로 무를 자르듯 깔끔하게 끊겼다. 심지어 내 메인특강까지도. 감내했지만 정말 힘들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캠프 강의를 하겠다고 해야 하나 갈등도 많이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같은 연차 또는 나보다 오랫동안 강의를 해오는 강사들 일부보다 몸값이 올랐다.
여전히 캠프 강의는 잘 안 들어온다. 그러나 이유는 그 때와 다르다.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풋풋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페이와 상관없이 캠프 강의를 가려 마음을 먹어도 주최측에서는 지레 강의료가 맞지 않을 것 같아 섭외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굳이 비용 상관없이 가겠다는 의사표현을 해야 가능한 상황이다.
꽤 많은 강사지망생과 강사들이 나를 찾아왔었고 지금도 오고 있다. 많은 고민들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강사로 자리를 잡고, 몸값이 올랐는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솔직히 나도 정답을 말해줄 수는 없다. 정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주변의 비아냥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 선택에 따른 비용을 충실히 감내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정답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정답이었다.
콘텐츠가 없이 다른 이의 콘텐츠로 강단에 서기 시작하는 강사도,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해 뒤늦게 강단에 서는 강사도 그 과정에서 치러야 할 비용을 온전히 감내했다면 청중에게 울림과 공감을 줄 수 있는 명강사가 될 수 있다.
성과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포장한다.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한 어떤 선택이라도 결과적으로 의미있는 성과를 내는 순간, 그것을 위한 인고의 과정으로 포장된다. 직진으로 가든, 돌아서 가든 스스로 인정하는 무언가를 만날 때까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옳다.
누군가 다시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해 온다면, 나는 다시 물을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감내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