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너무 불합리하잖아. 재계약하려면 이 합의서에 동의해야 하는 거야?’
요즘 골머리가 썩을 정도로 계약서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할 게 뻔했다. 게다가 새로 들어간 일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모든 것이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꼬여만 갔다.
해결의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오면 내가 늘 하는 것이 있다. 일단 잠을 자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어렵사리 잠이 든다. 뭔가를 선택해야 하는 압박과 뭘 선택할 때마다 어김없이 덮치는 후회와 혼란. 꿈속에서도 나는 지쳐 있었다. 계속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눈을 뜨고, ‘이제는 깨어나자!’라는 마음을 먹는다. 현실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았지만, 머릿속이 조금 개운해졌다. 막막함은 여전했지만,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당장은 다 풀 수 없어. 오늘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우선 밥부터 챙겨 먹었다. 설거지부터 집 안 정리, 화장실 청소까지 밀린 집안일을 해치웠다. 빨래도 돌리고, 쓰레기통도 비우고,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무겁게 시작했지만, 몸을 바삐 움직였더니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그냥 평소 하던 일인데, 왜 이렇게 생각이 정돈되는 느낌일까? 신기할 정도였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일상 루틴의 회복력(routine resilience)’이라고 한다. 예일대학교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스트레스나 불확실한 상황에 처할수록 매일 반복하는 일상적 행동을 통해 안정감을 되찾고 불안감을 감소시킨다고 한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는 저서 『몰입(Flow)』에서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활동에 몰입하면 스트레스가 완화되고 정신적 에너지가 충전된다고 말한다. 즉 익숙하고 반복적인 집안일조차 마음을 진정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정리된 집만큼이나 내 마음도 정돈됐다. 여전히 할 일은 많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문제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을 그대로 한 덕분일까. 일을 할 때처럼 불확실한 상황에서 허덕이지 않고 예측과 통제가 가능해졌다. 묵묵히 해왔던 집안일을 했을 뿐인데 평화로워졌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제야 숨 돌릴 수 있는 ‘내 자리’가 생긴 느낌이었다.
내일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고, 답을 내리기 어려운 순간이 올 것이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나는 오늘을 살아내지 않았던가. 그저 보통의 일상으로 어려움을 견뎌왔던 것처럼 내일도 괜찮을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