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정직한 물

by Remind

모니터의 푸른빛이 서윤의 얼굴을 지치게 비추고 있었다.

오후 내내 붙들고 있던 보고서는 진전이 없었고, 등 뒤에서는 팀장이 던진 새로운 업무 지시가 포스트잇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서윤 씨, 이 데이터 정리해서 내일 아침까지 좀 부탁해. 민아 씨는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집중해야 하니까.”


입사 3년차인 민아 씨는 최근 기획팀의 핵심 프로젝트를 맡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녀가 빛나는 사이, 누군가는 그 빛을 위해 묵묵히 그림자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번번이 서윤의 몫이었다.


벌써 5년째였다.

같은 자리, 같은 직급. ‘서윤 대리’라는 명패는 닳지도 않고 그녀의 책상을 지키고 있었다.

월급은 물가상승률을 따라잡기 벅찼고, 통장에 찍히는 숫자는 성실함의 대가라기엔 초라했다.

누구보다 묵묵히, 때로는 바보처럼 우직하게 일했다.

하지만 세상은 정직한 노력만으로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서윤은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퇴근길, 축축한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올랐다.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꿈도 열정도 희미해진 채, 그저 하루를 버텨내는 무표정한 직장인.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가슴속에서 묵직한 돌덩이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집으로 곧장 갈 힘도 없었다.

그날따라 발걸음은 홀린 듯 수영장으로 향했다.

락스 냄새가 코를 찌르자,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회사에서의 복잡한 상념들을 소독해주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강습이 없는 날, 레인은 저마다의 속도로 헤엄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서윤은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강사의 구령도, 다른 회원들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도 없는 자유.

하지만 회사에서의 무력감이 그대로 몸에 남았는지, 서윤의 몸은 유난히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난 강습 때 배운 사이드킥을 연습해봤지만, 몸은 뻣뻣하게 굳어 번번이 균형을 잃었다.


‘왜 이것마저 내 맘대로 안 되는 거야.’


자꾸만 허둥대는 스스로에게 울컥, 화가 치밀었다.

레인 끝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르는데, 지난 강습 시간 강사의 목소리가 문득 귓가에 맴돌았다.


‘침대에 옆으로 누웠다고 생각하고 힘을 빼야 해요. 물이랑 싸우려고 하지 말고, 그냥 몸을 맡겨봐요.’


가만히 기댈 때… 그 말이 서윤의 마음을 쿵, 하고 울렸다.

그녀는 늘 버티고, 애쓰고, 이기려고만 했다.

직장에서의 5년이 그랬다.


서윤은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다시 킥판을 잡고 몸을 옆으로 뉘었다.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았다.

강사의 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온몸의 힘을 빼고 물의 부력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렇게 가라앉던 몸이 수면 위로 가뿐하게 떠올랐다.


서툰 발차기와 함께, 서윤은 처음으로 5미터를 옆으로 누워 나아갔다.

귀밑을 스치는 물소리가 고요한 우주의 소리처럼 들렸다.

강습이 끝나고 텅 빈 수영장을 바라보며 서윤은 생각했다.


회사에서의 5년은 나를 제자리에 묶어두었지만, 물속에서의 한 달은 분명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직급이나 연차를 묻지 않았고, 오직 내가 쏟은 시간과 노력만큼 정직하게 몸을 띄워주었다.

서윤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배우고 있는 것은 단순히 수영 기술만이 아니었다.

애쓰고 버티는 대신, 온전히 나를 맡기고 세상의 흐름에 기대는 법.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기술일지도 모른다고.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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