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의 만 40번째 생일날이었어요. 며칠 전 작은 영화관에서 봤던 광고에 제가 좋아하는 배우 키키 키린님이 나오셔서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죠. 오늘은 나의 생일, 특별한 날이니까 보고 싶었던 영화로 선물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시간을 내었어요. 엄마이고, 일을 하다 보면 나만의 시간을 낸다는 것이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음에도 마음을 먹어야 가능할 때가 적잖아요.
만 40번째 생일에 고른 영화 선물은 오모리 타츠시 감독의 '일일시호일'이에요. 매일매일 좋은 날이란 뜻의 '일일시호일' 제목이 참 편안하죠. 포스터에는 제목 옆에 이 문구도 곁들여져 있어요. 키키 키린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작별인사. 그러니 제가 안 볼 수 없죠. 저와 우연히도 생일이 같아서 가슴이 설레었고,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대체 불가한 매력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참 부러웠어요. 그분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야죠.
주인공은 스무 살의 노리코예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키키 키린님이 연기한 다케다 선생님에게 다도를 배우게 돼요. 내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차를 우려내고 음미하며 마시는 시간 동안 다리도 저리고, 지루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무려 25년을 크고 작은 삶의 조각을 선생님과 공유하며 시간을 보내요. 노리코랑 저랑 닮은 점이 많았어요.
"나는 솜씨가 부족하고 센스가 없다. 그래서 여기서도 설 곳이 없다."(일일시호일 중에서)
저도 그랬거든요. 솜씨도 없고, 눈치 보고 우유부단한 마음에 행동이 빠르지 못하니 센스가 없다는 말도 듣고, 이 지구에 잘못 태어났다고 살았었거든요. 지구, 대한민국과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저를 늘 부족하고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 거죠.
노리코는 취직도 못하고, 오래된 애인과도 헤어지고, 10년을 배운 다도도 시원치 않게 느껴질 때 혼자만의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해요. 20대, 30 대란 기간이 다 그런가 봐요. 부푼 꿈을 안고 내 세상을 만들어 보리라 당차게 시작은 해 보지만 어딜 가도 서툰 것 같고, 잘 해내는 분들 보며 나는 안 되나 보다 포기하고도 싶고, 그래도 돌아설 수는 없을 것 같은 시절요. 그래도 다행히 노리코 옆에는 아프지만 일어나리라 묵묵히 믿고 기다려주는 가족과 다케다 선생님이 계셨어요. 가족이야 그럴 수 있지만, 노리코가 선생님을 계속 찾아가고 마음을 열고 나눌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인연이었겠죠.
제게도 상담이 그랬어요. 저의 지도교수님을 2000년 마지막 날에 뵙고, 스승으로 삼기로 마음먹었죠. 교수님 제자가 되었고, 상담을 배우러 다니고, 지금도 상담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슈퍼비전을 열심히 받으며 따라가고 있어요. 20대에 상담만이 길이라 여겼을 때 저의 힘든 마음 헤아려 주시고, 다독여 주심에 가장 큰 지지를 받았고, 교수님이 걸어오신 길을 따라 저도 중심을 잡고 열심히 쫓아갈 수 있었답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될 때도 임신했을 때마다 태교를 위해 교수님 집단상담에 참여해야만 안심이 되었어요. 그렇게 벌써 20년을 넘어갔네요. 교수님을 처음 뵙게 된 지 20년이 되는 날, 연락 드릴 일이 있어 통화를 마친 후 문자를 보냈어요.
"교수님, 20년 전 집단상담에 처음 참여했어요. 20년이나 흘러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교수님을 모실 수 있어 감사드려요. 제 인생의 값진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년에도 원하시는 일, 모두 이루어지시길 바라며, 언제나 뒤에서 따라가겠습니다."
"I am proud of you. Hyunsoon~"
교수님께서 바로 보내 주신 답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눈가가 뜨거워지는데 쏟아낼 수 없더라고요. 그러면서 영화관 속 스크린에 비추듯 저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어요. 비단 20년만이 아니었어요. 그 이전에 저의 삶에 있었던 미해결 과제들, 상처들 짚어주시며, 삶을 온전히 바라봐 주신 분이 자랑스럽다고 해 주신 말씀은 제게 건네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또, 제 삶의 신조와도 같은 알아차림을 알려주시고, 그 힘을 많은 분들께 전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셨어요. 이보다 감사한 인연이 또 있을까요.
일일시호일에서도 알아차림이 나와요.
"빗소리를 듣는다. 비 오늘날엔 빗소리를 듣는다. 오감을 동원해 온 몸으로 그 순간을 맛본다. 눈 오는 날에는 눈을 보고 여름에는 찌는 더위를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를 매일이 좋은 날이란 그런 뜻인가"(일일시호일 중에서)
혹독한 이별 앞에 무너졌다가 다시 찾아온 노리코에게 다케다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언제든 그만둬도 되죠. 그저 맛 좋은 차를 마시러 오면 되는 거죠."(일일시호일 중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깊은 슬픔 앞에서도 옆에 묵묵히 있어주신 다케다 선생님. 마음이 힘들고 너무너무 아플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정말 인생의 행운입니다. 저도 다케다 선생님처럼, 저의 교수님처럼 누군가의 인생에 언제든 힘이 들면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되고 싶어요. 제게 그분들이 그러했듯이요.
제가 20년을 돌고 돌아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었던 과정을 정리한 Mind Zero 프로젝트. 4주간의 과정을마칠 때는 뭔가 감이 왔기를, 그 힘으로 내게 다가오는 삶 속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어가시기를요. 왜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었는지를요.
여러분들의 마음이 성장하고 치유되고, 평온의 정점을 찾기를 진심으로 바랄게요. 또, 힘들고 아플 때 그저 차 한잔 하며 마음을 나누어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 주세요. 여기, 제가 함께 하겠습니다. 이 넓은 우주 속 버드나무와 당신, 마음상담사 Uni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