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독립투쟁기
(앞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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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그때 16살이었어. 큰 상처를 받았지. 울고불고 할아버지께 대들고 매달렸어. 아빠가 말씀하신 조건 다 통과하고 왔는데 왜 안 되냐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약속하지 않았냐고. 어떻게 어른이 아이와 한 약속을 이렇게 쉽게 저버리냐고. 어떻게 내 꿈을 짓밟는 사람이 나를 낳고 키운 아빠일 수 있냐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어. “그런 건 공부로 안 되는 애들이 하는 거야. 넌 공부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 음악 같은 건 그냥 취미로 하면 되는 거야. 대학에 가도 계속 음악이 생각나면 그땐 유학을 보내 주마.”
말도 안 돼!!! 할아버지의 말씀은 엄마에겐 전혀 설득력이 없었어. 그리고 엄마의 할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은 그렇게 장착되었지. 뒷 얘기가 궁금하지?
고등학교 때 공부를 내던지고 가출하고... 막 그랬어야 앞뒤가 맞는 스토리 같은데, 그러기엔 너무 순진했는지, 포기를 한 건지, 포기를 못한 건지, 회복력이 좋았던 건지. 풋. 지금의 엄마는 그 때의 엄마를 잘 모르겠다. 암튼 며칠 울고 발딱 일어나서 그럼, 대학에 가면 진짜 유학 갈 거라고 했어. 그때 가서 딴소리 하시면 안 된다고.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배정받은 미션스쿨 고등학교에 1년 동안 전국 순회 공연을 다니는 유명한 합창단이 있었거든. 합창부도 아니었는데 오디션 보게 해 달라고 선생님 찾아가서 오디션을 보고 거기에 들어가게 되었어. 노래 맘껏 부르고 춤도 추고 플루트 연주도 하면서, 음악과 우정으로 가득한 행복한 시절을 보냈어. 교도소나 논산훈련소에 가서 노래 불러 본 고등학생이 몇 명이나 되겠니. 어린 우리들의 노래를 듣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는 게 얼마나 놀랍고 감동적이었겠니. 잊지 못할 새로운 경험과 진한 우정 속에서 상처가 많이 아물었어.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에게 한 복수는,,, 우습게도 할아버지가 나온 명문대에 가지 않은 거야. 운명의 장난인지, 왜 하필 거기 갈 점수인 건지. 할아버지 소원을 들어주고 싶진 않았어. 너무 좋은 대학에 가면 음악으로 유학 안 보내 줄 것 같아, 대학을 한 칸 낮추었어. (지금 생각하면 굳이 그럴 것까지야 ㅎㅎㅎ)
네가 알다시피 엄마는 대학에 가서 음악으로 유학을 가지 않았어. ㅎㅎㅎ
대학은 또 한 번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커다란 시기였어. 대학에 가서 더 큰 세상을 배웠지. 할아버지, 할머니와는 생각도 많이 달라졌고. 가끔 식탁에서 의견 대립도 있었지만 이미 스무 살이 넘었는 걸. ㅎㅎ 할아버지, 할머니도 엄마의 생각을 바꿀 순 없었어. 엄마를 가둬둘 수도 없었어. 할아버지, 할머니도 속 많이 썩으셨을 거야. 할아버지는 하고 싶은 음악을 안 시켜 줬더니 애가 삐뚤어져 저런다고도 하셨지. (그러게 곱게 음악 시켜 주셨어야죠. ㅎㅎㅎ 넝담^^(feat. 더글로리))
하지만 아이가 부모가 정해준 길로 가는 게 아니더라고. 부모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가는 건 더더욱 아니더라고. 엄마의 경우는 그랬어. 법륜 스님이 그러시더라. 부모라 하더라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다고. 그건 그 분 요구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고.
- 그게 자꾸 뒤섞이게 되면 자기 인생의 진로가 안 생기죠. 부처님이 출가하실 때 엄마가 울고불고 반대했다고 하면 부처가 못 됐을 거예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하러 갈 때 엄마한테 얘기했으면 반대했을 거 아니에요? 스무 살 넘어 부모님 말 너무 듣는 사람 중에 인생 제대로 피는 사람 없어요.
부모가 늘 자식을 염려하는데 그건 그거대로 고맙게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나 내 갈 길은 내 갈 길대로 가야 해요.
당시 엄마가 이런 얘기는 몰랐지만, 어느 순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 더 이상 부모 뜻에 따라 살 수 없다는 걸. 27살에 집을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 시기에 집을 떠나 있으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많은 편지를 썼어.
하고 싶은 공부 안 시켜줘서 삐뚤어진 거 아니라고. ㅎㅎ 그동안 저 키워 주시느라 애 많이 쓰셨다고. 이렇게 건강하고 당당하게 키워 주셔서, 스스로 자기 인생 살아갈 수 있게 강하게 길러 주셔서 고맙다고. 저 같은 딸 있으니 두 분 인생 성공하신 거라고. 이제 제 걱정은 마시라고. 이제 저는 저의 갈 길을 갈 테니 그냥 지켜봐 달라고. 우리, 좋은 관계였으면 좋겠다고. 엄마는 그렇게 완전히 독립했어.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독립을 한 거지, 인연 끊고 나온 건 아니야. ㅎㅎ 그 이후 결혼 전에 잠시 집에 들어가 살기도 했는데 그땐 이미 관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어. 그 후 결혼을 하고 너를 낳고 점점 사이가 좋아지더라.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과 생각들은 그 자체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또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살게 되었으니까.
엄마가 부모로부터 독립한 이야기. 참 길었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늘 말씀하셨어. 너도 크면 달라질 거고 너도 크면 생각이 바뀔 거라고. 너의 그 생각은 어려서 그런 거라고.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 어른이라고 모두 생각이 같지 않아. 나이가 같다고 모두 생각이 같지 않아. 어른들의 생각이 다 옳은 것은 더더욱 아니야…
너도 네 생각이 있고 네 선택이 있고 네 결정이 있는데. 엄마의 경험과 생각, 의견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엄마, 너는 너. 엄마의 말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엄마는 엄마가 살아온 인생, 이거 하나밖엔 살아보지 않았어. 단 하나의 인생 경험 뿐이야. 그것을 절대적인 기준 삼아 엄마의 소중한 아이를 좌지우지하면 안 되는 거지.
그러니 엄마의 선택 말고 너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된다. 너의 선택을 하면 된다. 네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면 된다.
너는 엄마에게는 미래에서 온 손님이야. 이젠 엄마가 너의 뒤를 따라가야 할 거야. 그래서 엄마는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단다. 설령 부모라 해도 함부로 할 수 없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너는 그렇게 소중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란다.
그러니 아이야.
너는 네가 느끼고 생각하고 감각한 것들을 믿어도 된다. 네 스스로의 생각을 따라 살면 된다. 네 뜻, 네 결정을 따라가면 된다. 무엇보다도 너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네가 엄마, 아빠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너에게,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시간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네 안에 숨어 있는 여신의 존재를 자기 안에서 찾아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를 따라 사는(주1) 기쁨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엄마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네가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고 너만의 삶을 너답게 살아가는 것. 그것뿐이란다.
진심으로 사랑한다. 아이야.
그대들의 아이들은 그대들의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갈구하는 생명의 아들이자 생명의 딸입니다.
아이들은 그대들을 거쳐서 왔으나 그대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비록 그대들과 함께 지낸다 하여도 그대들의 소유물은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그대들의 사랑을 주되 그대들의 생각까지 주지는 마십시오.
아이들 스스로도 생각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몸이 머물 집을 주되 영혼이 머물 집은 주지 마십시오.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들이 꿈에서라도 감히 찾을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닮아 가려 애쓰되 아이들에게 그대들을 닮으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삶이란 뒤로 돌아가는 것도, 어제와 함께 머무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2)
※ 주1: 현경, 《미래에서 온 편지》, 열림원, 2001.
※ 주2: 지은이 칼릴 지브란, 옮긴이 유정란, 《예언자》, 더클래식,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