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독립투쟁기
아이야.
엄마는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단다.
겸손해서 하는 얘기도 아니고 듣기 좋으라고 하는 얘기도 아니야.
정말 엄마는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어.
엄마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너에게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는 것 같네. 오늘은 너에게 한번 털어놓아 볼까 한다.
네가 알다시피 엄마는 할아버지의 큰딸, 장녀야. 조금 더 수식어를 붙여 볼까?
아마 ‘할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매우 촉망받는 장녀였을 거야. 엄마는 너무 운이 좋게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똑똑이’ 유전자를 물려받았던 것 같아. 특별히 공부를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잘 했어. 애교도 없고, 눈치가 빠른 것도 아닌데 머리라도 좋아 정말 다행이었어. 할아버지는 엄마가 커서 법관이나 외교관이 되면 좋겠단 얘기도 많이 하셨지. 하지만 뭐, 어릴 때니까 엄마가 그걸 진지하게 듣진 않았던 것 같아.
할아버지는 엄마가 어릴 때 혼자 외국 생활을 많이 하셨어. 여러 나라에서 주재원으로 일하셨는데 할머니와 남매는 두고 갔지. 할아버지는 외국에 나갈 때마다 엄마나 삼촌이 흥미로워하는 여러 가지를 사 가지고 귀국하셨어. 과학을 좋아한단 얘길 들었는지 생전 처음 보는 과학실험 도구를 사다 주시기도 했고 유럽 각국의 신화 이야기가 담긴 인형들을 사다 주시기도 하고. 지금도 집에 있는 트롤 인형 같은 것들, 엄마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사다 주셨던 거야.
엄마는 할아버지가 사다 주신 처음 보는 진기한 것들을 만져 보고 다뤄 보고 불어 보고, 하면서 호기심을 한껏 충족시킬 수 있었어. 피아노 치는 것도 좋아하고 악기 갖다 주면 아무거나 금방 다루는 걸 보시고는, 중학교 들어갈 때쯤이었나, 플루트를 들고 귀국하셨어. 이 악기는 소리를 내는 것도 어렵더라고. 이렇게 불어 보고 저렇게 불어 보고 하다가 소리를 낼 수 있게 되고 그걸 배워 보게 되었어. 근데 너무 재밌는 거야. 집에 오면 숙제만 해 놓고는 몇 시간이고 악보를 열어 놓고 연습을 했지. 좋아했으니 아마 실력도 금방 늘었을 거야. 그렇게 2년쯤 배웠나. 언젠가부터 이걸 전공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예고 입시를 준비하겠다고 말씀드렸어.
그런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어. 할아버지가 난리가 난 거야. 우리 집은 다 공부 잘 해서 그걸로 성공한 집안이다. 공부 잘 하는데 왜 음악을 하겠다고 하느냐. 음악가가 되는 길이 얼마나 좁은지 아느냐. 취미로 하라고 사다 준 거지 누가 그걸 전공하라고 했느냐. 당연히 엄마도 맞섰지. 좁은 길이면 어떠냐. 내가 좋은 걸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난 공부보다 이게 좋다. 몇 날 며칠 할아버지께 제발 공부시켜 달라고 매달렸지.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도 할아버지를 설득하려고 많이 애를 쓰셨더라고. 하지만 할아버지는 허락하시지 않았어.
할아버지는 대신 조건을 걸었어. 좋다. 정 그렇다면 조건을 걸겠다. 콩쿠르에 나가서 상을 받아 와라. 그러면 음악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일종의 증명을 한 것이니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다. 엄마는 할머니와, 그리고 엄마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과 함께 작전에 돌입했어. 맞는 콩쿠르 일정을 찾아 보고 등록하고, 경연곡을 확인하고 반주자를 구하고. 그리고 연습에 돌입했지.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했을지 상상이 가니? 연습실 같은 건 없었어. 그냥 방에서 보면대 세워 놓고 주구장창 연습하는 거지. 녹음해서 들어도 보고. 복근 운동 열심히 하고. 그렇게 해서 엄마는 중3 때 콩쿠르에 나갔고 거기에서 1등을 했어. 할아버지가 건 조건을 한 번에 통과한 거야! 너무 기뻐서 할머니와 펄쩍 뛰었지. “됐다, 이제 됐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말을 바꾸시는 거야. 이번엔 두 번째 조건을 거시더구나. OO 선생님께 가서 재능이 있다는 확인을 받고 오라는 거야. 엄마는 할머니와 떨면서 그 분을 뵈었고, 그 분은 다행히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일반적인(?) 답변을 주셨어. 그땐 무지 떨렸는데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몰라. 어느 선생님이 생전 처음 보는 학생의 앞길을 막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뜻을 굽힐 생각은 없으셨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뭐였는지 아니?
“나는 그런 공부 시켜줄 돈은 없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