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아주다 Jul 10. 2021

우분투에서 임마누엘까지, '함께'라는 말이 주는 감동

아프리카 여행 그 후 이야기 마흔넷 @한국

아프리카 여행의 팀명 우분투(Ubuntu).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I am because you are. I am because we are.)’라는 뜻을 담고 있다. 가치까지 담고 있는 단어는 그 의미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의 지주대가 된다. 그래서인지 이 팀명처럼 여행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혼자 갔다면 아프리카 여행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겁이 많기도 했지만 렌터카를 빌리거나 경찰서에 가는 상황에서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거기까지 안 가더라도 운전을 못해 출발도 못했을 것이다. 평소 혼자 있는 시간을 중요시하고 희생정신이 부족한 내가, 우분투 팀을 만나 계속 챙김을 받고 모든 일에 함께 대처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공동체의 힘을 크게 느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는 사회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 같았는데 우분투 팀과 어려운 일도, 즐거운 일도 함께하니 소속감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만 잘해도 그룹 안에서 충분한 역할을 하고, 부족한 사람이 아닐 수 있는 점도 좋았다. 나 그 자체로 있어도 모두가 다 달라서 서로 빈 틈을 채워줄 수 있는 팀. 서로의 행동을 제지하는 말이 거의 없는 팀. 하나가 됐을 때 비로소 최고가 될 수 있는 팀. 인생에서 이런 팀을 만난 건 더없는 복이었다.


여행이라는 게 풍경이 아무리 좋아도 동행과 어긋나면 그 경치가 퇴색된다. 풍경이 주는 감흥이 적더라도 함께한 사람과의 교감이 좋으면 모든 것이 특별하게 뒤덮여 추억되기도 한다. 날씨가 좀 궂고 계획되는 일이 적어도 서로를 북돋는 사람, 내게 용기 주는 사람, 무엇이 펼쳐져도 감탄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모든 날이 빛났다. 이 동행들이 함께 했기에 내가 아프리카에 가볼 수 있었다. 우분투 팀은 '함께'의 가치를 가르쳐 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또 하나 알게 된 '함께'는 임마누엘의 함께이다. 나보다 더 큰 분이 내가 어디로 가든지 언제나 나와 함께 한다는 거다. 이걸 알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는데 알고 나니 이 세상에 더 이상 나 혼자가 아닌 것 같다. 부모님도, 언니도, 세상과 연결해주는 인터넷도 늘 곁에 있진 않지만 이제 어디서든 나와 함께하는 분이 생겼다.


「내 맘에 오시는 주」 강희만 작사∙작곡

내가 사막 가운데 홀로 있을 때
내가 광야 속에서 길을 잃어도
나의 슬픈 영혼이 다시 기쁨을 얻고
내가 평화 가운데 있는 이유는

우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 마음과 주님 생각을 간직하면서 살지
우리 마음속 가득 나의 마음속 가득
주님의 평화 넘치네

내 맘에, 내 맘에 오시는 주
당신의 평화와 사랑을 내게 부어주시고
무너진 나의 집 나의 마음
새로운 힘으로 살게 하시네


성당에서 이 성가를 들은 적이 있다. 노랫말을 음미해보니 나미비아 첫날 세시림으로 달리며 봤던, 깜깜한 사막의 밤도 생각나고 에토샤 국립공원 가는 길에 입구가 막혔던 밤도 생각났다. 자꾸만 두려운 상황에 몰려서 "예지, 너는 안 무섭냐"라고 물었다가 예지한테서 "난 그분과 함께 하니까"라는 말을 듣고 '그럼 나는 왜 혼자 다니지?' 하며 소외감을 느꼈던 것도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은 나도 그분과 함께인 것 같아서 감회가 새로웠다. 텅 빈 내 마음 안에 평화와 사랑이 차곡차곡 쌓여 새로운 힘으로 살게 됐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공간적 상황과 내가 위축됐던 심리적 상황을 대입하면 성가나 성경이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마라'가 365번 나온다고 한다. '임마누엘,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말도 더불어 많이 나온다. 성경이 이런 말이 쓰인 책인지 미처 몰랐다. 마치 누가 날 알기도 전에 나와 만나게 될까 봐 미리 꾹꾹 눌러놓은 편지 같다. 내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이기도 할 것이다. 두려워하고 외로워하는 것 말이다. 그때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말이 참 위로가 된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는 부모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면 기세 등등해진다. 또래들의 등살에 밀려도 기죽지 않는다. 가끔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나도, 혼자 있으면 긴장하지만 아부지가 동석해서 이것저것 일러주면 안전에 대한 부담감이 훨씬 줄어들곤 한다. 두려워하는 나와 누군가 함께한다는 건, 함께하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한 것 같다.


솔직히 아직도 신이 정말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을 때가 있다. 다만 신의 성정을 닮으려는 사람들 안에서 서로의 신이 돼줌으로 힘과 용기를 얻는다.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슬픔을 '내가 슬픈 것은 신을 슬프게 만드는 일이다, 이것이 죄다'하고 슬픔을 타자화(他者化)시키면 나한테는 함부로 할 수 있지만 신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염려에 나와 슬픔을 격리시켜 보기도 한다. 또 누군가 나를 가엾게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에 어른이 다 돼서도 어린아이처럼 위로받기도 한다. 그것도 안 되면 부모님이 주시는 조건 없는 사랑이 '신이 나를 지켜보는 마음이겠지' 하며 헤아려보기도 한다. 신앙인으로 새로 살겠다는 다짐,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실천해야 신이 드러난다는 생각에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있다. 눈에 보이는 나의 행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감화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눈에 보인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있다.
때로 몸보다 마음이 더 크게 자아를 휘두르는 것 같다.


그동안 몸 건강을 위해 헬스장은 많이 다녔으면서 왜 마음 건강은 신경 쓰고 살지 못했을까. 나는 종교가 마음 헬스장처럼 느껴진다. 마음 헬스장을 다니며 군더더기 살도 빼고 알토란 같은 근육도 키우며 신앙인으로 성장 중이다. 삶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기고 겸허하게 살아가고 싶다.


주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있다.



▶ 다음 이야기


◀ 첫 이야기


이전 21화 20대 마지막 선물, 세례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