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odin Gallery-Glass Pavilion
이름이 조금은 생소한 미술관,
Rodin Gallery-Glass Pavilion.
1993년 이건희 전 삼성회장은 신경영체제를 선포한다.
그룹의 모든 CI도 지금의 삼성CI로 바꾼다.
지금까지 벌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의 경영.
7.4제라고 하여 그룹의 전 계열사의 출퇴근시간을 7시출근 4시퇴근으로 규정하고 이른 퇴근시간의 활용을 위해 그당시 자기계발비용을 회사에서 한달 8만원까지 1:1로 지원한다.
어학이되어도 괜찮고 스포츠가 되어도 된다. 20년전의 8만원이란 결코 작지 않다.
본인분담까지 합하면 16만원을 스스로의 발전에 사용할 수 있었던 시절.
그와 발맞춰 외형, 즉 본관도 대대적인 renovation을 통해 이미지 변신을 꾀한다.
남대문 앞의 삼성본관은 70년대 초반 삼성그룹 1대 회장이었던 이병철회장시절 지어졌다 이후, 1984년 삼성본관 남단에 구 동방생명 사옥이 들어선다. 이는 이후 삼성생명으로 명칭이 바뀐다.
이제 신경영체제에 걸맞는 사옥을 준비하려 Design competition을 개최하고 신규로 지어지는 삼성본관 북측 중앙사옥과 함께 renovation 계획이 결정된다.
당선회사는 미국의 KPF(Kohn Pedersen Fox Associates)로 결정되었고 당연히 국내 대관업무관련 일을 진행할 회사는 당시 삼성 관계사였던 삼우설계가 Local architect로 결정되었다.
변변한 미술관 하나 가지고 있지 못했던 삼성 문화재단(당시 재단 이사장은 이건희회장의 부인 홍라희 관장)은 기회로 삼아 미술관을 계획한다.
기존 호암미술관처럼 빌딩안에 숨어있는 곳이 아닌 독자적인 외형을 꿈꾸었으나 문제는 건축법이다.
이미 건폐율을 다 차지했던 터라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대관은 조건부로 승인된다.
KPF의 partner 3명중 삼성본관renovation의 총괄디자이너는 Bill Pedersen 빌 페더슨이었고 Rodin Gallery-Glass Pavilion의 디자이너는 Kevin Kennon 케빈 케넌이었다.
참고로 3건물을 지하로 연결해 상업시설로 사용하는 공간 디자인은 JIP(Jerde partner)다.
원형거푸집(Mold)에 청동을 부어 만드는 조각인 Rodin의 작품중 original edition(진품)으로 인정 받는것은 12번째까지로 제한을 둔다.
당시 삼성문화재단이 영구 전시를 위해 구입한 작품은 The Gates of Hell지옥의 문과 The Burghers of Calais 깔레의 시민이다.
지옥의 문은 일본에 이어 7번째 edition이고 깔레의 시민은 12번째 edition이다.
이 두 작품의 보호를 목적으로 대중에게 오픈된 공간으로 만들어지게된 Rodin Gallery-Glass Pavilion의 디자인 개념은 2가지다.
하나는 공식적으로 삼성 문화재단에서 발표한것이고 다른 하나는 디자이너가 개념발표 후에 본인의 의도와 다르다고 이야기한 내용이다.
우선 공식적 입장은 두 손을 형상화한 로댕의 작품 The Cathedral 성당에서 글래스 파빌리온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깔레의 항복자나 지옥의 문에 걸터앉아 있는 The Thinker 생각하는 사람처럼 근육이 넘쳐나는 남성적인 손이 아니라 부드럽게 포개어진 여성스러운 손이다.
로댕이 의미하는 성당은 외피가 지니는 힘찬 외형이 아니라 기독교적 신앙을 대신하는 조용하고 충만한 공간이다.
이에반해 디자이너 였던 Kevin Kennon 케빈케넌은 남자무용수는 가운데 서고 여자무용수가 그의 주위를 도는 전통발레의 동작 pas-de-deux빠드드에서 착상을 얻었다는 것이다.
다른 각도와 높이로 서 있는 두 유리벽은 중심성과 회전성을 각기 포용한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바로보는 시각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서로의 의도대로 디자인은 완성되었다.
자연스레 기울어진 이중 반투명 유리벽은 내부와 외부, 삼성생명과 갤러리 외관상의 조화를 이루고, 갤러리 내부에 역동성을 불어 넣는 동시에 자연광을 확산시켜 부드러운 분위기를 창출하며, 상징주의 조각의 특징인 고정된 형태를 거부하고 조각표면에 반사되는 빛의 그림자에 의해 창조되는 고요함을 포용한다.
반투명 유리로 만들어진 벽면의 사이사이에는 투명유리를 끼워 마치 창문처럼 만들어진 공간을 통하여 보행자들이 내부의 작품을 들여 다 볼 수 있도록 디자인 하였다.
또한 서로 다른 각도로 축조된 벽은 ‘지옥의 문’의 정면감과 대비가 되는 ‘칼레의 시민’의 공간감을 정의하기에 적절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두 작품의 크기와 높이를 고려하여 ‘칼레의 시민’은 천정에 정사각형 모양의 부가천정을 만들었으며, ‘지옥의 문’의 경우에는 천정이 따로없이 경사진 Glass Pavilion의 지붕을 통하여 바로 자연광을 받을 수 있도록 그 위치를 선정하였다.
Glass Pavilion은 고도의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복합 유리 구조체인 만큼 유리의 제작과 시공을 담당하는 업체선정에 있어서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다.
구조담당은 영국의 Ove Arup 오브 아럽, 유리제작과 시공은 독일의 Garner가르너, 판유리는 불란서의 Saint-Gobain 생-고뱅, 독일의 Vegla 베글라, 유리가공은 오스트리아의 Eckelt Glas 에켈트등 유럽의 회사가 참여했다.
백년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347년 8월 3일 계속된 영국군의 공격 앞에 프랑스의 항구도시 깔레는 무릎을 꿇는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시민 지도자 여섯 명에게 밧줄을 목에 메고 맨발로 깔레의 열쇠를 바치게 명령한다.
항복의 공포와 굴욕에 잠겨있는 군중을 헤치고 이들은 시장에서 출발하여 영국군 진지를 향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걸음을 내딛는다.
죽음의 공포보다는 앞으로 견뎌내야 할 고난 때문에 Eustache de Saint-Pierre 우스따쉬 드 쌩 삐에르는 머리를 숙이고 눈을 반쯤 감은 채 걷는다.
그의 왼쪽에 열쇠를 잡은 Jean d'Aire 쟝 데르는 영국왕 앞에서 당할 굴욕을 생각하며 몸이 굳는다.
절망감에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진 Andrieus d'Andres 앙드리외 당드레가 그를 따른다. 그의 오른쪽에 순교를 달갑게 받기를 결심한 Jacques de Wissant 쟈끄 드 비쌍이 성급히 걷고 있고, 그의 동생 Pierre 삐에르는 끔찍한 악몽을 내쫓는 몸짓을 한다.
이들 중 가장 젊은 Jehan de Fiennes 예한 드 피엔느가 바삐 앞사람을 따른다.
깔레의 항복 후 500여 년이 지난 1895년 오귀스트 로댕에 의해서 재현된 조각 The Burghers of Calais 깔레의 시민의 모습이다.
’깔레의 시민‘과 ‘지옥의 문‘을 의뢰한 것은 프랑스 정부였다.
1871년 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를 침입한 독일은 빌헬름 1세의 황제즉위식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거행한다.
그후 프랑스의 조각은 쇠퇴하는 애국주의를 선동해야하는 부담을 안게된다.
공화정 시대의 깔레 역시 500여년 전의 치욕적 사건을 기념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갖고 있었다.
로댕이 11년간에 걸쳐서 만들어낸 ’깔레의 시민‘은 음악과 춤, 행진과 연회 속에서 제막되었다.
조각이 놓여질 자리는 당연히 일상의 삶에 가까이 있어야 하는 깔레의 Place Richelieu 리슐리외 광장이었다.
로댕이 죽을 때까지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지옥의 문‘ 역시 Musee des Arts Decoratifs 파리장식미술관 입구의 청동문으로 쓰여질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말 프랑스의 조각은 애국주의 고취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공공광장과 묘지뿐만 아니라 귀족계급의 집에 있는 조각은 그들의 지위와 부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로댕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복제에 대한규정을 작성하여 사후 제작을 인정하였다.
세종대로에 위치한 삼성생명 빌딩(현재는 부영에 매각되었음)에 1999년 개관하여 한국 미술계 발전에 기여해 오다가, 2011년 플라토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했으며 아쉽게도 현재는 운영을 중단한 곳이어서 외관만 살펴볼 수 있다.